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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V 특집] 호국보훈의 달 인터뷰(1) “여성 참전용사 자부심…전쟁 다시 일어나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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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혜정 기자
  • 승인 2019.06.1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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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경 출신 최정순 할머니가 전하는 6·25전쟁 참상

열아홉에 태백산·지리산 경찰전투사령부에 자원해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된 최정순(87) 할머니. 그는 여경·여군 출신의 참전유공자다.

 

“의무실에 근무할 때 보면 포탄에 맞아서 한쪽 팔이 떨어져나가고, 화상 입은 부상병도 오는데 뜨거워서 떼굴떼굴 굴러요. 죽은 사람들은 손으로 대충 덮어놓고 그랬어. 그런 걸 볼 때 ‘참 전쟁이란 게 너무 한심하다’ 싶더라고.”
꽃다운 열아홉, 태백산·지리산 경찰전투사령부에 자원해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된 최정순(87) 할머니.
‘참전용사가 여자라고? 그것도 빨치산 토벌?’ 취재차 6·25참전유공자회 울산지부에 들렀다 회원 중 할머니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자는 지난달 24일 울산매일 UTV 본사에서 최 할머니를 만났다. 지팡이 대신 고명딸인 박지혜 씨의 손을 붙잡고 나타난 할머니는 걸음이 느리고,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듯 했지만 다행히 건강한 모습이었다.  

  열아홉에 전쟁 발발하자 경찰 자원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돼
  부상병 치료하며 참혹한 전장 경험
  남녀 다함께 한 막사에서 고군분투 
“무섭다기 보단 ‘춥다’는 것만 느껴
  다시 전쟁나도 나라 위해 총 들 것”

6·25전쟁을 중심으로 정리한 최정순 할머니의 일생은 이렇다.
1932년 경남 함양에서 5남매 중 맏딸로 출생.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진주여고로 진학했고, 졸업한 1950년 6월에 전쟁이 터졌다.  
그 해 12월 정부는 공비토벌을 위해 태백산·지리산 경찰전투사령부를 임시 창설했고, 할머니는 자원했다. 부상병을 치료하는 의무실 배속을 희망했고, 전투가 한창일 때는 빨치산이 들끓는 지리산 고지의 막사에서 남자들과 함께 먹고 잤다.
1952년 9월, 경찰전투사령부가 해체되자 국립경찰전문학교로 진학해 충청북도경찰국, 영동경찰서, 충주경찰서에서 근무했지만 건강악화로 퇴직하게 됐다. 
전쟁 이후 여군 간부후보생 모집공고를 본 할머니는 용산 여군훈련소를 거쳐 소위로 제대했다.  서른넷 늦은 나이에 결혼해 슬하에 2남 1녀를 뒀고, 2002년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참전유공자증서를 받았다. 
‘구국·호국경찰’이라는 이름으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된 최정순 할머니에게 6·25전쟁의 참상을 들어봤다.

 

영동경찰서에서 근무했을 때 모습. 6.25전쟁 당시 태백산·지리산 경찰전투사령부에서 활동한 최정순 할머니는 1952년 경찰전투사령부가 해체되자 국립경찰전문학교로 진학해 충청북도경찰국, 영동경찰서, 충주경찰서 등에서 근무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으세요?
▲ 의무실에 근무하다가 바로 ‘달궁 작전’이 있다고 해서 완장 메고 함양 마천지역까지 가고, 11월 달에 눈 펄펄 오는데 갔어. 지리산에서는 농민들 끌어다가 그냥 총 메고 쏘게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요. 그땐 의료적인 것을 안 배웠기 때문에 한쪽 팔이 떨어져 와도 그냥 상처 난데 기름 발라서 붕대 감아 주고 그랬어. 제일 기억 나는 건 그거야. 포탄에 맞아서 화상 입어서 오면 뜨거워서 떼굴떼굴 굴러요. 그러면 큰 드럼통에 물 담아서 자꾸 찬물에 식혀줘. 살이 식어야만이 화상이 안 번지니까.

 

젊었을 적 봉숭아를 물들이며 친구들과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최정순 할머니.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열아홉 소녀였는데 무섭진 않으셨나요?
▲치료하느라 정신없는데 환자 보느라 무서운 건 없었어. ‘춥다’ 그거만 느꼈지. 
인민군들 넘어왔을 때는 겨울이라 총 맞아서라기보다는 얼어서 많이 죽었어.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다 춥게 옷을 입었더라고. 나중에는 숨어 있으면 그 사람들도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밥도 가져다주고 그랬다고. 적이라는게 한참 쏘고 그럴 때는 적이지, 같이 있을 땐 적이 안되지.
죽은 사람들 보면 미군이고, 인민군이고, 아군이고 안타깝지. 미군들도 죽어서 손으로 덮어놓고 그랬어. 그런 걸 볼 때 참 전쟁이란 게 너무 한심하다 싶고, 다시는 후세대 사람들은 이런 걸 안 겪어야 되겠다 싶더라고.

 

전쟁 이후 최정순 할머니는 여군 간부후보생 모집공고를 보고 입대했다. 당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최정순 할머니(하단 왼쪽)는 참전경우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참전 당시에 여성이 또 있었나요?
▲여자는 하나도 없어. 고지에선 남자들하고 한 막사에서 같이 잤지. 그때는 남자고 여자고 구분할 경황이 없었어. 어디서 공비들이 들어오는가 싶어서 그런 것만 신경 썼지. 
여자답지 않고 남자들처럼 돌아다닌 그런 것이 사람들한테는 부끄럽지. 그래도 나는 나대로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훈장만 보면 흐뭇해요. 진짜 그래요. 후회하지는 않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는 게 내가 기특하지. 내가 나라를 위해서 좀 봉사를 했구나 싶어. 

 

2002년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참전유공자 증서.

 

-전쟁이 나면 또 참전하실건가요?
▲지금도 전쟁이 터지면 총 들고 나갈 수 있어. 그런데 전쟁 절대 안나요. 안 나야 되고. 이제 그런 일은 없어야지.

 

글=조혜정 기자 jhj74@iusm.co.kr
사진=신섬미 기자 01195419023@iusm.co.kr

 

■ 송재현 수습기자의 팩트 체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전국에서 여경·여군을 포함해 2,400여명의 여성이 참전했다.


또한 참전 여경 중 현재 생존자는 최정순 할머니를 포함해 33명이다(대한민국재향여경회 조사자료). 울산에서는 최 할머니 혼자다.  


최 할머니가 투입된 대표적인 전투는 ‘달궁 전투’. 


지금은 전북 남원의 유명한 피서지이지만 당시 지리산 자락의 달궁 계곡에는 빨치산 지휘관 이현상을 비롯한 공비 900여명이 무기공장까지 만들며 은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1951년 10월, 군경은 작전에 돌입했다. 90명이 넘는 적을 사살했지만 아군 역시 40여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할 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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