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를 아는 기생충 먹을 만큼만 먹어
사람 몸에서 타협·공존하는 법 알아
100% 나쁜 존재라고 말할 수 없어

 
숙주와의 공생 룰은 엄혹한 현실
여야 상생·공존 룰 깨진 우리정치
좋은 ‘기생충의 세계’를 더듬어 봐야

 
영화 `기생충'의 필수 공간인 `반 지하'는 한국사회의 가난과 불평등의 한 단면이다. 사진은 제작사가 공개한 영화의 `반 지하' 에서 생활하는 가족 모습.
김병길 주필

2017년 판문점을 통해 귀순하다 총상을 입은 북한 병사 오청성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엔 ‘기생충’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를 수술하는 과정에 수 십 마리의 기생충이 쏟아졌다. 큰 것은 몸길이가 무려 27㎝나 됐다.

19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장내 기생충 누적 감염률은 200%에 달해 국민 한사람이 2종 이상의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었다. 우리 정부는 1966년에 ‘기생충 질환 예방법’을 공표하고 1971년부터 2013년까지 5~7년 주기로 8차에 걸쳐 국민 장내 기생충 감염실태를 조사했다. 1971년 제 1차 조사 때에는 감염률이 무려 84.3%였으나 1986년 제4차 조사에서 12.9%로 급감하더니 2013년 제8차 조사에서는 불과 2.6%로 나타났다.

예전에는 회충, 구충, 편충과 같은 토양 매개성 선충이 주를 이뤘으나 차츰 간흡충과 요코가와흡충 감염률이 높아졌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나타나는 후진성 기생충인 흡충 감염률이 높은 까닭은 여전히 민물고기를 날로 먹는 식습관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장내 기생충은 거의 박멸된 상태다.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뇌리에 기생충이 다시 떠올랐다. 영화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게 된데는 ‘잘된 번역’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여 년간 한국영화를 깊이 있게 접해온 미국인 평론가 달시 파켓이 한국적 정서를 정확히 꿰뚫으며 의역한 덕분이라고 한다.

그가 ‘기생충’에 영어 자막을 달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이 ‘반 지하’였다. 이 영화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공간이 반 지하 였다. 그 반 지하의 늬앙스를 적절히 담은 영어 단어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세미 베이스먼트(semi basement)’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반 지하에 사는 이가 거의 없는 영어권 관객에게 이 생소한 단어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반 지하’라는 설정은 묘하다. 발바닥은 지하에 붙이고 있지만, 눈은 지상으로 난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볼 수 있다. 천장에 가로막힌 현실과 보자기만한 햇살의 꿈이 공존하는 지점이다. 희망과 절망을 버무린 공간이다. 지상에선 내일과 삶의 질을 생각한다. 반 지하에서는 오늘 당장의 생계가 걱정이다. 이러한 두 집이 숙주와 기생충으로 얽힌다.

한국 사회에서 반지하가 던진 메시지는 ‘가난’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상징인 기생충과 반 지하는 불평등의 한 단면으로 떠오른다. 빈부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봉건시대처럼 사람들은 계급에 따라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옷을 입고, 다른 꿈을 꾸면서 산다. 그것이 극단적으로 다시 현실로 나카나기 시작한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영화 ‘기생충’은 성공한 사업가 박 사장의 으리으리한 저택과 취객이 ‘쉬’마저 일삼는 반 지하방의 극명한 대조부터 그렇다. 요즘 우리사화의 자영업 붕괴나 갈수록 줄어드는 일자리 등을 슬쩍슬쩍 건드린다.

하지만 영화는 그 어느 편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세상이 두부 자르듯 2분법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사악한 부자, 선량한 빈자라는 도식이 파고들 틈은 보이지 않는다.

단국대 서민 교수는 2016년 펴낸 ‘기생충 콘서트’에서 “100% 나쁜 기생충은 없다”고 했다. 인간의 몸에서 타협하고 공존하는 것이 기생충이라고 했다. 대장균은 기생 박테리아인데, 이들이 음식을 분해함으로써 흡수체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또 이런저런 기생충이 박멸되면서 아토피 같은 자가 면역 질환도 늘고 있다고 한다.

서 교수는 기생충을 착하고, 독특하고, 나쁜 종류로 구분한다. 한편으로는 기생충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기생충이 희망’이라고까지 말한다. 뚱뚱한 사람은 있어도 뚱뚱한 기생충은 없다는 얘기도 이채롭다. 분수를 아는 기생충은 항상 먹을 만큼만 먹는다고 한다. 숙주의 양분을 과하게 뺏으면 자신이 살아갈 곳까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명확한 공생의 이치는 어쩌면 엄혹한 현실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대립과 갈등에 기생하는 계급이 곳곳에 뿌리박고 있다 주장한다. 정치인을 그 대표적인 존재로 지목한다. 지역감정에 기대어 ‘공천=당선’ 선거제도를 절대로 바꾸지 않으려 한다. 모두가 선량한 국민을 현혹해 숙주로 만든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기생의 모습이다. 여야 상생이나 공존의 룰이 사라진 지금 우리 정치판은 `기생충의 세계'를 더듬어 봐야 한다.

다른 동물에 붙어서 양분을 빨아먹고 사는 벌레.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빌붙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기생충(寄生蟲·parasite)의 사전적 정의는 불쾌하게 들리지만 ‘좋은 기생충’도 있다. 인간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예의를 지키느냐에 따라 기생이 되느냐, 공생이냐, 상생이 되느냐 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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