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편 대신 총 잡은 미3사단 카투사 이춘락 참전용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23살에 입대한 이춘락(92) 할아버지가 미 3사단 시절 전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70년 전 전쟁통에서 겪은 일들을 회상하고 있다.

 

“피란민들 절반도 못 싣고 흥남부두에 다 떼놓고 왔다꼬. 수송선에서 망원경으로 내다보니까 배 탈라꼬 줄 서 있던 피란민들이 전부 이 배를 바라보고 원망하듯 서있는 것이 그렇게 마음 아프더라꼬.”
1·4후퇴 때 미3사단 소속으로 피란민 수송을 지원했던 이춘락(92·울산 중구 복산동) 할아버지. 
울산매일 UTV가 6·25전쟁 69주년을 맞아 인터뷰한 이 할아버지는 영화 <국제시장>의 첫 장면이기도 한 흥남부두 철수작전의 참상을 이렇게 소회했다. 아흔을 넘긴 참전용사에게 그날의 포화 소리와 피란민들의 아우성은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전쟁통이라고 죄다 아픈 기억만 남았을까. 중공군 시체와 한 참호에서 밤을 보냈던 백마고지 전투, 중기관총 명사수인 할아버지 뒤만 따라다녔다는 신병 스미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주고받은 크리스마스 카드, 마릴린먼로의 위문공연 등은 그리운 추억이자 할아버지의 18번 무용담이 됐다. 

 

1950년 12월 함흥 사진관에서 찍은 모습.

 

 

학생 가르치다 23세에 입대…제대 후 울산서 교편 잡고 1994년 퇴임
백마고지 전투 투입돼 중공군 시체 악취 맡으며 작전 수행 “지독했던 현장” 
중기관총소대 부사수로 활약…실력 출중해 따라다니던 미군 병사도
아이젠하워 美 대통령과 주고받은 크리스마스 연하장 일생 자랑거리

 

이춘락 할아버지의 일생은 이렇다. 
1928년 울산 북구 농소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출생. 
해방 직후 교원양성소를 거쳐 스무 살에 교단에 섰고, 스물 셋 되던 1950년 전쟁이 터지자 그해 9월 입대했다. 
미3사단 카투사 소속으로 6·25전쟁 최고 격전지로 꼽히는 백마고지 전투와 오성산 전투에서 중기관총소대 부사수로 활약했고, 함흥부두 철수작전에도 투입돼 피란민 수송을 지원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크리스마스에 연하장을 주고받은 일화는 할아버지의 큰 자랑거리다. 
1953년 휴전 후에도 바로 제대하지 않고 부산 55보급창에서 근무하다 그 이듬해 4월 만기 제대했다. 
제대 후 교단으로 복귀한 할아버지는 울산 화진초, 강동초, 효문초, 복산초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94년 양사초등학교에서 정년퇴임했다. 5선인 중구 정갑윤(5선·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을 직접 가르친 은사이고, 제자 중에는 노태우 정권 때 내무부 장관을 지낸 故 김태호 국회의원 형제들도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6·25전쟁 등 동아시아 격변기를 치러낸 이 할아버지에게 전쟁의 참상을 들어보았다.

1950년 11월 함흥에서 찍은 사진.

 

-교편 대신 총을 잡으신 거네요?

▲원래 교직원들은 소집이 면제됐어요. 그런데 군인이 부족해지니까 우리한테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고. 나는 아이들한테 가르친 대로 병역의 의무를 나부터 실천해야 되겠는 생각에 먼저 입대하게 됐어.

그래 미3사단 카투사에 배속을 받았는데 한국인이 3분의 1, 미군이 3분의 2인 혼성부대였거든. 부산 적기만에서 배를 타고 일본 오이타현(大分県)에 벳부(別府)라는 데를 가서 미군 교관 밑에서 두 달 신병 훈련받고는 군함을 타고 이북 원산에 상륙했다고. KSU라고 민간인들 피난시키는 대민지원 활동을 주로 했어요.

 

미 3사단에 근무했던 카투사 전우들과 함께(왼쪽 첫번째).

 

-백마고지 전투에 직접 투입된건가요?

▲백마고지는 해발 395m인데 여기를 서로 차지할라꼬 인민군, 중공군, 한미연합군이 2만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어. 국군 9사단이 백마고지에 있을 때 전투가 치열했어요. 밤낮으로 포탄 소리가 들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고지 주인이 바뀌고 (1952년 10월 6일부터) 열흘 동안 스물 네 번의 주인이 바뀐 곳이 여기야.

그때 우리는 백마고지 후방에 있었는데, 한 열흘 전투가 치열하고 희생자가 많으니까 결국 9사단이 후퇴를 하고 우리가 야간을 틈타 교대로 들어갔어요. 백마고지에 올라가면서 9사단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뼈저리게 느꼈어요. 왜냐하면 표고가 낮아질 정도로 포탄이 많이 떨어졌고, 초목이라고는 한 포기도 없고... 악취가 나는데 사람의 악취는 정말로 지독합니다. 이튿날 아침에 날이 새고 보니 중공군 시체 여러 수백구가 철조망에 걸려 있더라고요.

 

-무섭지 않으셨어요?

▲하나도 무서운 줄 몰라요. 고지에 올라가면 자기 몸을 숨기기 위해서 참호를 팝니다. 그래서 막 파다 보니까 뭐가 나오는데 나는 그저 나무 뿌리인줄 알고 잡아당겼는데 보니까 죽은 중공군 허벅지가 튀어 나오는거라. 심지어 중공군들이 죽은 시체 밑에 굴을 파서 자기 몸을 숨기는데도 겁이 안나요. 살아야 하니까.

중공군들은 미군들의 화력을 제일 겁냈어. 그래서 우리 미3사단에 감히 덤벼들지 못하더라고.

 

군인 시절 모습.

 

 

-흥남부두 철수 때도 현장에 계셨다구요?

▲그때가 1950년 12월 24일 오후 2시30분에 흥남부두 거기서 떠났는데 우리 수송선에 피난민들도 많이 태워왔어요. 저기 함흥, 청진 이런 데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흥남부두에 많이 모였는데 절반도 못 싣고 거기에 떼놓고 내려왔다고. 왜냐면 워낙 급하니까, 중공군이 막 밀고 내려오니까. 그래 피란선(미군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르고 나서 망원경으로 보니까 살기 위해 배를 타려고 줄을 서서 수없이 기다리던 피란민들이 전부 다 이 배를 바라보고 원망하듯 서있는 것이 그렇게 마음 아프더라고.

그리고 또 기억나는 게 흥남부두에 전쟁 물자를 놔두면 적의 이용물이 되기 때문에 철수할 때 전부 폭파시켰어요. <국제시장> 영화에도 나오지? 선상에서 망원경으로 폭파하는 장면을 우리가 보고 나왔어.

 

-흥남부두 피란민 얘기 도중 할아버지는 동짓날이면 생각나는 한 아주머니가 있다고 했다.

▲그때가 동지였던 모양이에요. 어느 집을 지나가니까 팥죽을 한참 끓이더라꼬. 그래서 ‘아줌마, 그 팥죽 한 그릇 줄 수 없느냐’ 하니까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드세요’ 해. 일주일 주둔하는 동안 그 집 가서 밥도 얻어먹고 팥죽도 많이 먹었어요.

그래서 피난 올 때 크리스마스 이브날이야. 그 아주머니한테 같이 이남으로 피난 가자고 설득을 했어요. 그런데 그 아줌마 하는 말이 ‘우리 아들이 지금 인민군에 갔는데 제대해서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나는 우리 아들이 살아 돌아기를 기다리기 때문에 피난을 못 간다’ 이러더라고. 그렇게 해서 피난을 안 오고 놔두고 온 것이 그것이 내 마음에 상당히 인상 깊게 남아있습니다. 아직도 그 팥죽 맛은 절대 안 잊어요.

 

젊었을 적 동료와의 모습.

 

-참전용사의 기억에는 강제징집으로 생이별한 젊은 부부 이야기도 있다.

▲1951년 12월 24일인가 23일인가. 아침 8시쯤 한국군만 ‘완전무장해서 모여라, 구룡리에서서호진까지 18세이상 45세 남자는 전부 붙잡아 들여라. 이남으로 데려간다’ 이래요.

그래서 우리가 약 지어 가는 사람, 시장 보고 가는 청년… 내가 알기로는 100명은 데려 왔습니다. 오전 10시쯤 되니깐 자기 남편이 이남에 간다는 걸 알고 부인들이 어린애를 업고 면회하러 왔어요. ‘당신 이남에 가면 우리는 어떻게 사냐’ 하니까 남편이 ‘걱정마라, 3개월 후면 다시 올라온다. 그동안 애 잘 키워라’ 이러고 헤어졌는데, 그게 3개월이 아니라 벌써 70년 동안 가족들이 생이별을 했다고.

중기관총소대 부사수로 근무하던 모습(왼쪽)
미군과 함께(왼쪽 첫번째)했던 한때의 모습.
이춘락 어르신을 따라다녔다는 미군 스미스. 이춘락 어르신은 그를 찾아 몇 년 전 수소문 해봤지만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 생각도 나시겠네요?

▲강원도 김화에 해발 1,000m가 넘는 오성산이라고 있어요. 휴전 직전인데 1953년 6월에 내가 중기관총소대 부사수로 있었다고. 그런데 갑자기 적의 포탄이 떨어지고 중공군들이 몰려와서 전투를 했어. 그 때 참호 안에 나하고, 백인, 흑인, 푸에르토리코(카리브해 대앤틸리스 제도에 위치한 미국 자치령)인, 이렇게 네 사람이 있었는데 인종이 다 달랐지. 사수가 미군인데 총도 못 쏘고 벌벌 떨고 있어서 내가 방아쇠를 당기니까 중공군들이 쓰러졌어. 그러다가 고지가 중공군 수중에 들어가서 아군 보병들은 후퇴하고. 참호에서 우리 4명이 하루를 버티니까 아군이 반격해 고지를 재탈환하고 다행히 살아 나왔지요.

오성산 서부능선에 있을 때 스미스라고 훤칠하게 잘 생긴 백인 신병 하나가 보충대로 우리부대에 왔는데 돈 벌려고 참전한 대학생이라. 나보고 ‘당신은 전쟁에서 얼마나 지냈느냐’ 물어. 내가 ‘3년 됐다’ 이러니까 깜짝 놀라면서 ‘와, 당신은 전쟁에서 안죽는다’ 이거야. 그러고부터는 화장실에 갈 때 말고는 내 뒤만 따라다녀. 그래 나중에 특무상사까지 지내다 미국으로 무사히 돌아갔어요. 몇 년 전에 스미스하고 대화를 하고 싶어서 미국에 내가 문의를 했는데 못 찾아, 뭐 딴 데로 이민을 갔는지.

1952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받은 크리스마스 연하장.
군인 시절 당시 주고 받은 편지들.

 

-할아버지 최고의 자랑거리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주고받은 연하장이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미군들이 친지들한테 연하장을 많이 보내더라고. ‘옳지, 나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한테 보내야겠다’ 싶어서 화이트 하우스 주소를 받아서 연하장을 보내니까 일주일만에 미국 대통령한테서 ‘연하장 잘 받았다’고 회답이 왔어. 그 후로 미군들이 날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지요. 글 쓸 줄 모르는 미군 병사들이 나한테 와서 연애편지 대신 써달라고 부탁도 하고 그랬지.

참으로 미국도 본받을 점이 많다고 느낀 게 아이젠하워 대통령 둘째 아들(존 소령)이 한국에 파병됐다고. 그 아들이 우리 미3사단 예하부대 대대장으로 복무했거든. 1952년 12월인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들을 만나려고 취임하기 전에 당선인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어. 일반 사람이나 대통령이나 자기 아들은 보고 싶었는 모양이제. 그래 아이젠하워가 우리 사단장(밴 필리트 사령관)을 만나 하는 이야기가 ‘아들이 북한 포로로 잡혀 가지 않게만 해달라’ 이거라. 대통령 아들이 적군에 포로로 잡히면 작전에 차질이 생긴다고, 그렇게 부탁하고 갔어요.

가령 우리나라 대통령쯤 되면 자기 아들을 최일선에 파병시키겠느냐, 참으로 미국도 본받을 점이 많구나, 했어.

1954년 미릴린 먼로가 군부대 위문공연을 하러 온 모습.

 

-파병 미군을 위로하기 위해 마를린먼로가 한국에서 공연을 한 일화도 추억이다.

▲왜 육체배우 있쟌아. 강원도 금화지구인가 거기에 마를린먼로가 위문공연을 왔더라고. 전우들이 휘파람 부르고 야단이 났어. 육체배우 아니야. 이때가 휴전되고 난 뒤에 1954년 2월이야.

휴전 당시에 38선 근방에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했어요. 고등학생들도 거리로 나와서 휴전 반대 데모하고 그랬는데, 솔직하게 우리 군인들은 휴전에 환영했어요. 전쟁이 끝나야만 고향에 갈 수 있으니까. 그래도 나는 휴전하고 바로 제대 안하고 부산 55보급창에서 더 복무하다가 제대했어요. 총 4년 5개월 정도 군 생활 했지.

그의 참전용사 공로를 증명하는 훈장들.

 

-아흔의 노병은 만약 지금 전쟁이 터지면 어떻게 할까. 

▲다시 전쟁에 참가해가지고 활동할 용의가 있어요. 죽는 게 무서워 전쟁에 못 간다, 이거는 없어요.

 

■ 송재현 수습기자의 팩트체크

√할아버지가 카투사?

미군은 지상군 전투 병력을 보충을 위해 한국군 병력으로 증원한다는 계획을 수립해 보고했다. 1950년 8월 낙동강선 방어작전시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명령’으로 카투사 제도가 처음으로 시행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들도 6·25전쟁 참전용사?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2년 12월 2일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대통령 당선시 그의 둘째아들 존 아이젠하워는 미 육군 소령 신분으로 미3사단 예하 대대장을 맡아 최일선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마릴린 먼로가 한국에 위문공연을?

마릴린 먼로는 뉴욕 양키즈 타자 조 디마지오와 결혼 후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1954년 2월16일 한국에 방한, 3박 4일간 군부대 위문공연을 10여 차례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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