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옛터비에 담긴 기억들 – 공단 이주민이야기
(8·끝)  이재구(1948년생)씨의 남구 황성동 성외마을

공장 들어선 지 18년만에 이주 마무리… 거의 마지막으로 마을 떠나  
이주 전 500년 된 당수나무 갑자기 죽어 골매기 귀신 없단 말 못해
다운동 이주택지로 간 마을사람 대부분 정착 실패… 일부는 돌아와     
향우회·청년회 활동 이어지고 있지만 옛터비·애향비 없어 아쉬워

 

이주하기전 황성동 성외마을 전경. 넓은 농토와 깨끗한 바다로 인해 풍족한 마을이었다.

경북 의성에서 살던 부모님들이 제가 태어난지 3일만에 울산으로 이사를 했다고 해요. 일본 형사들을 피해 야반 도주 했다고 들었어요. 명촌교 맨 아래 대도라는 마을에 정착한 후 여러곳을 헤메고 다니다 내가 아홉 살 때 성외마을에 왔어요.


어려운 집 사정으로 열 여덟살 때 잠수라는 걸 배워 일을 시작했어요. 일본 말로 머구리, 머구리가 되는 과정까지가 시간이 좀 걸려요. 배를 탔다고 해서 바로 머구리가 될 수 있는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안 가르쳐 줘요.

나를 가르쳐 준 사람이 지금은 고인이 됐는데, 그 어른이 피곤했는지 “니, 내 옆에 있으면서 일을 배울라나?” 하고 물어봐요. 배우겠다고 했더니 “니가 한 번 해봐라.” 이러면서 가르쳐줘요. 한 1년 동안 배웠는데, 다행스럽게 한마을 사람이라 그 사람이 내 성장 과정도 알고, 살아온 형편도 알고 이러니까 빨리 가르쳐야 되겠다 싶었는지, 물속에 자주 넣어 준 거지.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배웠어요.
 

이재구(1948년생)씨의
# 잠수일 배워 해외 건설현장에서 작업…사고로  한쪽귀 멀어

군을 제대하고 여수로 가서 해물바리를 좀 하다가 중공업에 일이 있어가지고 그때부터 중공업 일을 했어요. 돈을 조금 모아 내 배를 만들었어. 그게 74년도쯤 될 거라. 그런데 쓰던 거를 샀는데, 배가 아주 많이 낡았지. 그래 해서 망했어요. 천원 벌면 2천 원을 갈 사고가 자꾸 생기더라고요. 자꾸 기계가 말썽을 일으켜요. 결국 남의 배를 타다가 중동을 가게 됐어요.

76년도에 사우디 가서 해군본부 건설했어요. 77년도 6월 달인가 사고로 내가 귀국을 하게 됐어요. 내가 왼쪽 귀가 고막이 나가서 잘 안 들려요. 오른쪽 귀만 계속 사용하다 보니까 귀가 자꾸 멀어져가지고 지금은 보청기를 끼고 있어요. 나 같은 경우는 사고였어요. 흙을 받아 붓는 사람을 스데바라 그러는데, 스데바가 도자로 밀어 넣다가 도자를 물에 빠트린 거라. 그래서 그 도자 인양 작업을 하다가 와이어가 터져가지고 그래서 물 밑에서 헬멧이 벗겨져 버렸어. 죽을 뻔했고, 그때 타격으로 한 쪽 귀를 잃었지. 사우디에서는 치료가 안 돼가지고 서울 고대 병원으로 와서 5개월인가 6개월을 있었어요. 안 죽고 살아온 게 다행이라 그랬으니까 병원에서는.

공장이 들어서고 마을 이주가 시작됐지만 보상 종료된 게 18년 걸렸을 겁니다.

이주는 91년도, 92년도에 제일 많이 했지. 나는 95년도에 하고. 나는 맨 마지막까지 남으려고 했어요. 내가 최고 책임자는 아니었어도 그래도 그때 통장을 했고, 천도굿을 할 때 내가 제관을 했고. 천도굿을 일주일 했어요. 그때 당시에 내가 청년회 회장을 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먼저 나가는 사람들이 철거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있던 사람들이라. 그러니까 뭐가 잘못됐다 이런 말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야. 나는 저런 욕은 안 얻어먹어야 되겠다고 해서 한 80%가 나가고 난 다음에 나갔지.

성외 마을 주민이 정확하게 177세대가 있었어요. 그중 세입자가 한 17% 정도 돼. 나머지는 다 좋든 나쁘든 간에 자기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부 한 479명 되나? 세입자 가정에는 가족들이 3~4명밖에 안 됐어. 그 정도밖에 안 됐기 때문에 세대 수에 비해서 인구는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한 60%는 슬레이트집이고, 나머지 40%는 기와집이었어요. 기와집들은 비교적 생활능력도 있고 사회적으로도 그래도 힘을 쓰는 사람들이 살고, 젊은 세대들 80%가 회사원이야. 내 친구가 스물세 명인데, 다섯명만 어업에 종사하고 나머지는 회사 생활을 하든 시내 나가 서비스업을 하든 이런 걸 했거든.
 

해외에서 일할 당시 동료들과 함께.
# 보상금 적어 처음엔 이주 반대

우리 같은 경우는 철거에 결사반대했지. 논밭이 없고 달랑 집 조그만 거 하나 있었는데, 그 집 보상 가지고 어디 가서 집을 짓는다는 생각도 못 해봤고. 그러니까 ‘여기서 떠나면 또 세입자 생활해야 된다.’ 이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땅도 많고 집도 큰 사람들은 이주를 기다렸어요. 보상금이 그때 당시 몇천에서 몇억 이러니까 와~ 했다 아이가. 90년도 그때만 해도 3억, 4억 하면 어깨에 힘주고 다니고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보상을 딱 받아놓고 보니까 동생이라고 달라 그러제, 딸이라고 줄라 그러제, 아들이라고 줄라 그러제. 이래 주고 저래 주고 나니까 정작 자기는 집 지을 형편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흥한 사람은 열 사람인데 망한 사람은 90명이라. 다 잘못됐어.

마을 사람들 절반 정도가 다운동으로 갔는데 집을 팔든 땅을 팔든지 한 사람이 80%가 잘못됐어요, 다운동으로 간 사람들에겐 다 택지를 줬기 때문에 집을 지어서 갈 수 밖에 없었지. 근데 돈이 있어야 집을 짓지. 그러니 택지라도 팔 수밖에. 나 같은 경우 2,500만원 받아 2,200만원을 택지값으로 주고 나니 300만원 남잖아요. 그것으로 집을 지을 수 있나. 다행히 야음동에 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 팔아 보태서 3층집을 지었어요. 야음동 2층 집 팔아 다운동에 1층 더 올린거지. 3층이 되었으니까.

우리 동네에서 제일 언덕바지에 제당이 있었어요. 거기에 500년 된 당나무가 있었어. 소나무. 그런데 철거가 된다고 말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당나무가 먼저 죽어요. 당나무가 먼저 한 2~3년 시들시들 하다가 죽어버렸다고. 천도재 할때 그때 우리 동네는 당나무가 없었어요. 이미 죽어버렸어요. 마을마다 다 그랬어요. 당나무가 2~3년에 걸쳐서 싹~ 다 죽어버려. 그 주위에 나무들은 다 까딱없는데. 그런데 그때 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고. 저 나무가 왜 죽지만 했지. 지나고 보니까 희한하게도 철거되는 마을 나무만 싹 다 죽었더라고. 그걸 보면 마을 골매기 귀신이 없다는 말은 절대 못 하겠더라고. 참 희한해. 500년 된 나무가 죽더라니까.
 

바다에서 본 옛 집. 지금은 흔적도 없다.
# 마을 당사목 이주하기전 대부분 고사… 골매기 귀신 없단 말 못해

마을 제당은 그 다음 해에 아무도 모르게 회사에서 부숴버렸어요. 현판은 우리가 떼와 태워 재로 만들어서, 그 재를 내가 문수산에 뿌렸어요.

향우회는 내가 통장을 할 때 만들었어요. 청년회도 내가 통장 할 때 만들었고, 90년대 만들었지. 지금도 모임하지요. 1년에 네 번을 만나는데. 나는 지원만 해 주고, 향우회가 내가 나가면 우리 아들 되는 40대, 50대가 그리 들어와 있거든. 그런데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거기 가 있으면 좀 그렇잖아. 그래서 뭐 할 말 있으면 회장한테 하고 협조할 일 있으면 회장 불러가 살짝 이래 또 해주고. 향우회에서 체육대회도 하고, 주로 관광을 가지.

내가 망향비 그걸 못 해 한이라니까. 다른 마을에는 망향동산, 망향비, 애향비, 옛터비 이런거를 해 놨는데, 우리 동네는 그걸 못했어요. 동네 사람들이 협조를 해 줘야 되는데, 그때만 해도 애향비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거야. 전부 다. 동네 돈을 좀 남겨놔야 되는데 돈은 하나도 없어. 애향비를 못 만든 게 지금 내가 제일 가슴이 아파요.

울산이 공업화되어 발전한 것을 나는 되게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내가 손해 본 거 떠나가지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 생각해 보면 울산이 되게 자랑스러워요.

우리 마을에 노래가 있는데 ‘한밭 뜰 넓은 농장 우리의 일터, 앞바다 생산물도 우리의 보배’ 이런 마을 노래가 있어요. 선경합섬 전체가 우리 마을 농토였지요. 여기서 나오는 농작물이 마을 사람들 다 먹고도 남아. 애들 학자금은 어디서 나오느냐 전부 바다에서 다 나왔어요. 그만큼 좋은 땅인데, 공장 부지에 들어갔다는 거는 참 안타까운 일이지.

공장에 안 들어갔으면 우리 마을 멋지게 됐을 거야. 우리 마을에도 아주 멎진 고층 건물이 들어섰을 거라. 위치가 그만큼 좋았어.

정리=고은정 기자 kowriter1@iusm.co.kr
자료제공 = 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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