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매일-반구대포럼 공동 기획 '대한민국 인류유산 대곡천암각화군'
18. 천전리 『서석암각화』  - 그들의 사유세계(2) 

 명문 새긴 신라인들 각석 상단
 선사 암각화 문양 인식하고
 원명(原銘)·고곡(古谷) 새겨

 
 유람 행렬 장면 새긴 선각화엔
 토우 연상 인물상·갑옷 등 확인
 제작시기?제작자 추론 가능

 
 뚜렷한 형태의 배 그림
 신분 높은 여성도 함께 했을 수도
‘갈문왕과 누이’ 애틋함 느껴져

 
6세기 경 신라인들이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천전리각석 하단부의 그림 <행렬도>와 명문 도식화. 필자 제공
김현권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학계에 보고된 바위그림인 국보 147호 천전리각석(蔚州 川前里刻石)이라 불리는 흥미로운 한국의 미술이 있다. 대곡천암각화군의 세계유산등재를 위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입증하는데 반구대암각화 만큼이나 중요한 유적이다. 이 각석의 상단에는 사실적인 동물상과 추상 문양으로 이루어진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암각화가 있으며 하단에는 신라시대에 새겨진 명문(銘文) 등이 산재해 있다. 이렇게 한 공간에 시간을 달리하는 미술이 펼쳐져 있기에 흔히들 선사인과 신라인이 각각 새겼을 거라고만 이해한다. 그렇지만 조금 더 고민하면 ‘신라인이 명문 등을 새길 때 선사암각화를 보았을 텐데 이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을까?’ 혹은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이 질문은 한반도의 선사와 고대의 문자를 이해하는 시작점이 된다.
 
# 갈문왕과 누이의 애틋한 사연

상기의 질문을 해결해 줄 코드는 사량부(沙粱部) 수장인 사부지(徙夫知)갈문왕(葛文王)이 그 누이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과 함께 유람하였을 때 각석에 새긴 <원명(原銘)>에 비밀스럽게 담겨 있다. 이 명문에는 ‘고곡무명(古谷无名)’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즉 ‘오래된 계곡(古谷)은 이름이 없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계곡이 오래된 것과 근래 만든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굳이 ‘고곡’이라고 한 점은 어떠한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일 텐데, 단어의 의미상 갈문왕과 그 일행은 이 골짜기가 신라 이전 시기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로써는 천전리각석 상단의 선사암각화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외에는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다.

또한 <원명>에는 ‘곡선석득조서(谷善石淂造書)’라는 흥미로운 글귀가 눈에 띈다. 일반적인 한문 해석과는 다른 신라시대 방식으로 직역하면 ‘계곡에서 좋은 돌(善石)을 얻어 글을 만들었다’이다. ‘선석’은 현재 <원명>이 새겨진 바위 면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천전리각석에서 선사암각화가 있는 자리는 비교적 평평한 반면에 <원명>이 새겨진 면은 상대적으로 울퉁불퉁해서 글을 새기기가 곤란하다. 결코 ‘좋은 돌’이 아니다. 그래서 삼국시대에 새겨진 선각화를 깎아내는 수고를 감수하고 그 위에 새겼다. 그러므로 위의 글귀는 다르게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갈문왕은 525년에 천전리에 유람 왔는데 선사시대 암각화를 발견하였고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신기해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석’은 단순히 글자를 새기기에 ‘좋은 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암각화가 새겨진 ‘훌륭한 돌’이 된다. 이는 상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갈문왕 일행과 신라인이 유람을 와서 새긴 명문과 선각화 대다수가 선사암각화를 피해 아래 면에 새겼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는 분명 신라인이 선사암각화를 의식했다는 증거가 된다. 선사암각화에는 반구대에서 보이는 동물 외에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이 상당히 보인다. 미술사학자 허버트리드(Herbert Read)가 선사미술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해 갔다고 하였으며 문자는 이 추상화 단계의 끄트머리에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사실->기호->문자의 과정이다. 천전리각석에 있는 선사암각화의 추상 문양은 기호에 해당하며 문자 이전의 형태이다.

그렇다면 갈문왕은 선사암각화를 보고 훨씬 이전의 고대 기호나 문자를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 그림 내지 기호를 글자처럼 이용한 예가 안압지 출토 목간에서 확인된다. 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이 목간에는 사람의 눈·코·입을 각각 문양으로 만들어 글자처럼 사용하였는데, 선대의 관습이 민간에서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갈문왕 일행은 분명 선사암각화를 보고 고대의 의미 심장한 표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원명>의 글에 ‘오래된 계곡(고곡)’과 ‘훌륭한 돌(선석)’이라는 표현이 나올 수 있었다.
 
대곡천암각화군의 핵심유산 중의 하나인 천전리각석. 울산매일 포토뱅크

 
#현존하는 신라의 첫 회화 ‘행렬도' - 토우 등으로 제작연도 추론 가능

이제 천전리각석은 신라시대에도 중요한 공간이 되기 시작하였고 갈문왕을 포함한 신라인은 행렬 장면이 묘사된 선각화를 석벽에 새겨 넣게 된다. 햇살이 석벽을 비추는 아침에만 하단의 좌측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 <행렬도>는 신라의 미술 중에 현존하는 첫 회화이다. 이 선각화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누가 새겼을까. 그리고 언제 새겼을까?

<행렬도>의 제작 시기는 마치 신라토우를 연상하는 인물상의 모습에 담겨 있다. 특히 기마인물상은 형태를 대충 만든 후 간단한 구멍을 내어 눈·코·입을 표현한 토우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이러한 형식의 신라토우는 주로 5세기 중후반에서 7세기에 제작되었으므로 이 <행렬도> 역시 비슷한 시기가 된다. 이 선각화의 제작 시기는 묘사된 인물이 어떤 부류인가를 추론하는데 단서를 제공한다. 천전리각석에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명문 중에서 소속이나 관등, 혹은 신분이 파악되는 인물을 신라의 육부(六部)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6세기 신라 사회의 중심세력 중에 사량부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양부(梁部)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이 두 세력의 주요 유람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천전리각석이 있는 곳은 사량부의 관할지역 이었기에 수장인 갈문왕을 비롯해 사량부 소속 신라인이 이곳을 집중적으로 유람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행렬도>의 제작자는 사량부 소속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좀 더 살펴보자.

<행렬도>에는 갑옷을 입은 인물상들이 가장 크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는 고대의 화법(畵法)으로, 갑옷을 입은 인물상이 행렬의 우두머리임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행렬도>가 4개의 군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오른쪽에는 두 척의 배가 묘사되었으며, 두 번째는 갑옷을 입은 기마인물상과 일군의 인물들, 세 번째는 말에서 내린 기마인물상 등이 새겨져 있으며, 마지막으로 좌측면에는 갑옷을 입은 인물상이 표현되어 있다. 이중에 갑옷을 입은 인물상은 두 번째 군에서는 말을 탔으며, 세 번째에서는 말에서 내려 걷고 있으며, 마지막에서는 도착하여 정지해 있는 것 같다. 마치 장면이 이어지고 있으므로 기마인물상은 한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첫 번째 군은 기마인물상을 비롯한 행렬이 말을 타기 이전의 상황이 된다. 이는 고대의 회화 기법중 하나로 시간 순서에 따라 구분하여 표현하는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을 사용한 결과이다.
 
# 서라벌에서 출발 배로 태화강 거슬러 유람했을 가능성도

이 <행렬도>의 규모는 두 번째 군에서 갑옷을 입은 기마인물상이 산개를 쓰고 있고 춤추는 여인과 인물들이 이어져 있는 장면을 통해 대략 가늠할 수 있다. 이 점은 이들이 어떤 교통수단으로 천전리각석을 이용하였는가를 파악하는데 단서를 제공한다. 천전리각석을 유람하는 신라인들은 주로 육로를 이용하였을 것이나 <행렬도> 속의 일행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이곳에 오기위해 선각화의 첫 번째 군에 표현된 두 척의 배를 이용하였다. 배의 형태가 정확하지 않으나 뱃머리와 후미가 둥글게 되어 있는 모양은 강이나 연안을 다니는 당시의 평저선(平底船)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천로나 해안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 경로는 두 가지인데, 우선 포항까지 간 후 그 곳에서 배를 이용하여 연안을 타고 울산으로 내려가 태화강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로가 있으며, 다음으로 경주에서 포항까지 이어지는 평야를 이용한 후 마찬가지로 태화강을 이용하는 경우일 것이다. 이 모습은 그대로 <행렬도>에 재현되어 있다. 배를 이용한 이유는 우리도 모를 특별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텐데, 이중에는 행렬의 규모가 크거나 신분이 높은 여성이 포함된 경우도 해당될 수 있다.

만일 후자라면 우리는 갈문왕과 그 누이의 유람을 떠올릴 수 있으며, 그러기에 드라마 같은 상상을 떠올릴만하다. 사량부의 수장인 갈문왕은 525년에 사랑하는 누이와 함께 천전리각석을 유람하였다. 이 일행은 선사암각화를 바라보며 이전 시대의 기호 내지 문자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신비로운 경험을 석벽 하단에 글로 새겼던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유람을 기념하고자 고대 인물화법을 이용한 <행렬도>를 바위에 새기지는 않았을까? 굳이 갈문왕 일행이 아니라도 천천리각석의 선사암각화는 본래의 의미를 넘어 선사와 역사 두 시대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은 변하지 않는다.

갈문왕은 12년 뒤인 537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누이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은 그를 잊지 못하였기에 2년 뒤인 539년에 천전리각석을 다시 방문하여 그와 함께 유람했던 날을 회상하며 <원명> 옆에 이 사실을 남겼다. 오늘날 이를 <추명(追銘)>이라고 한다. 이로써 천천리각석은 신라인의 사랑이 스며져 있는 장소가 되었다. 이제 천전리각석은 갈문왕과 누이의 유람으로 인해 신라사회에 서석곡(書石谷)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을 것이며 신라인들이 즐겨 찾게 된다. 9세기까지 계속해서 새겨지는 명문이 이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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