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통행금지 폐지’(1982) ‘인구 4,000만명 돌파’(1983) ‘신상옥 최은희 납북’(1984)…. 1955년 신문 연재 시작 후 45년간 총 1만4139회로 은퇴한 국내 최장수 네 컷 시사만화 ‘고바우영감’은 한국 현대사의 만화경이었다. 9월8일 87세로 별세한 김성환 화백은 안경 차림에 콧수염과 한 올의 머리카락뿐인 고바우 영감을 앞세워 살아있는 권력을 통렬히 풍자해 인기를 끌었다. 
‘고바우’라는 이름은 정겨운 우리 옛 이름 바우에 높을 ‘고(高)’를 성으로 붙였다. 고바우는 6·25전쟁 중에 김 화백이 개성에 있는 친척 집에 곡식을 얻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탄생한 캐릭터로 알려져 있다. 1958년 경무대(현 청와대)의 절대 권력을 비판했다가 사상초유로 만화에다 허위보도 유죄 선고를 받은 ‘경무대 똥통필화'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 일화 중 하나다. 
1982년 5월 9일, 1만회 기념 연재분에서 김 화백은 ‘(원고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 서민주택 한 채는 되는 구나’라고 썼다. “찌그러진 3평 반짜리 판자 집에서 일곱 식구가 살았으니 어렵게 사는 사람들 배경을 잘 안다”고 했다. 돈 없는 후배만화가 밥 사주고, 용돈 주고, 여행까지 보내주던 따뜻한 선배로 기억되고 있다. 만화가로는 처음 2013년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했고, 이듬해 ‘올해의 기부왕’ 대상을 받았다. 
한국의 네 컷 신문 시사만화는 1955년 ‘고바우 영감’으로 새출발 했다. 김 화백이 동아일보에 그리기 시작한 만화는 전쟁 후 고단한 서민들 삶에 웃음을 주는 만화였다가 점차 정치 사회 풍자만화로 변신했다. ‘고바우 영감’은 1980년 조선일보로 옮겨 12년간 연재된 뒤 2000년 문화일보에서 45년 연재를 마쳤다. 
권력이 기사를 검열하던 시절 만화는 민심을 에둘러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독자들은 만화 주인공의 선문답 같은 대사에서 행간을 찾아 읽으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지금 종이신문 독자들 중엔 신문마다 연재되다 어느날 부터 사라진 네 컷 시사만화를 잊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적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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