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미범서초 교사

1953년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하는 야드바셈 기념공원 건립
유대인 피해와 관련 없는곳에 건립 비판…전시회 보완해 완성
상처·과오 돌아보고 성찰…인간다움 지키려 애쓰는 것 필요

독일의 수도 베를린 중심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 19세기 이후 전쟁에 승리한 독일민족이 개선문으로 사용한 독일의 영광과 승리를 나타내는 이 상징물에서 걸어서 10분 이내의 거리에 홀로코스트(Holocaust) 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살해당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이라는 공식 명칭이 있는데도 ‘홀로코스트(Holocaust) 기념관’라고 불린다. 우연히 찾아본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어원이 품고 있는 당황스러운 뜻에 나도 모르게 앞이 잠시 깜깜해 지는 경험을 했다. 신에게 바치기 위해 전부 태우는 방식으로 희생된 동물을 뜻하는 이 단어는 점차 대량 학살의 뜻이 더해져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정작 유대인들은 신을 위한 제물로 비유되기보다는 히브리어로 대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라는 단어를 더 선호한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렇게 무지는 또 하나의 실례를 유발하고 뒤늦게 알게 되고 나서는 낯 뜨거움을 야기한다. 그렇게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한 단어의 힘만으로 죄스러움과 참담함으로 다가왔다. 
나치 정권과 그 협력자들에 의하여 600만의 유대인에게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탄압과 대량학살이 이루어졌다. 1933년 집권한 나치는 독일인을 우월한 인종으로, 유대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구분하였다. 더 나아가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집단을 확대하여 집시로 지칭되는 신티와 로마 부족, 장애자, 동성연애자 등이 탄압과 대학살의 대상이었으나 가장 많은 피해는 유대인이었다. 
1953년, 이스라엘 현대사의 국립 기념시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 기념의 언덕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야드바셈 기념공원이 건립되었다. 야드바셈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과 나치 독일에 저항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야드바셈 기념공원의 영향으로 독일에서도 희생된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지 건립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공모를 통해 1999년 6월 25일,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인젠만(Peter Eisenman)이 제안한 홀로코스트 기념관 디자인이 채택되었다. 1만9,000㎡의 완만하지만 불규칙적인 지형에 2,711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열과 오를 맞추어 서로 다른 높이로 배열되며 물결 모양의 지형과 콘크리트 기둥의 물결 사이의 길이 사방과 연결되는 신기한 디자인의 기념관이다. 거리를 두고 보면 물결이 보이지만 기념물 사이로 진입하는 순간 각각의 기둥이 무덤이나 묘비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건축가는 방문객의 내적 동요를 일으키기 위하여 각진 기둥의 모양으로 구현했을 뿐, 공동묘지와 무관하다고 했다. 인간적 감성을 결여한 나치 독일의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구현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건축가의 설명과는 달리 방문객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공동묘지를 떠올리며 각각의 기둥을 희생자의 이름이 없는 가묘로 받아들인다. 건축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결국 이 장소에서 가지는 감정을 포함한 모든 내적 움직임은 전적으로 관람객의 몫이다. 
통일 수도에 건립하기는 했지만 유대인의 피해와 전혀 상관없는 장소에 정치적인 영향을 받아 건립된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유대인들은 비판했다. 성찰이나 추모의 내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 개인의 삶을 드러내는 전시회를 보완하여 기념관을 완성하게 되었다. 
지하로 내려가서 천장을 보면 지상에서 보았던 기둥과 그 사이의 길들이 2차원으로 옮겨진 느낌이 든다. 지상의 기둥에서 연결된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공간 구성에 유대인들을 밟고 올라선 나치 군인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유대인 가족들의 소소한 생활이 인화된 사진, 그들의 편지와 같은 사료가 학살로 짓밟힌 이들의 소우주가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다르지 않고 소중한 가치를 지닌 존재였음을 담담히 드러내고 있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인간이 만들어낸 잔혹한 역사적 사건을 마주하면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피터 아인젠만의 말처럼 이해가 불가능하다. 상처·과오를 그대로 드러내어 돌아보고 성찰하여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다움은 사람의 행위와 그 행위의 연속인 삶에서 구현된다. 인간적일 것, 행동할 것.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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