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세기말이나 1세기경 중국서 건너온 철
울산 달천철장의 역사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
철 문화 흔적 찾아 ‘달천철장 관리시설’ 가보자

 

허보경
울산시 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산업도시 울산의 근간이 됐던 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는 곳이 작년 12월 27일 북구의 달천철장 유적공원에 문을 열었다. 철과 관련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줄 ‘달천철장 관리시설’이 그곳이다. 역사를 보면 미래가 보인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온 철문화(鐵文化)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文化)와 철(鐵), 어떻게 보면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일지 모르나 고대사회의 문화수준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지표중의 하나는 제철기술이었고 그것이 현대 사회까지 이어져 왔다는데 이견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철이 없었다면 현대 문명도 없었다.
역사적으로 철기의 기원을 중국 요하 유역이나 한반도 북부지역에서는 기원전 4세기경으로 보고 있지만,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이 남부지역으로 옮겨와 나라를 세우면서 남부지역의 본격적인 철기 문화는 기원전 2세기말이나 1세기경에 시작됐다. 이렇게 중국에서 건너온 철 문화는 한반도를 통해 일본열도로 전해졌다.

달천철장 유적은 원래 ‘달내’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고, 철장(鐵場)이란 철의 원료인 토철(土鐵) 또는 철광석(鐵鑛石)을 캐던 곳을 말한다. 고대 철의 역사 살펴보면, 삼한시대 변한에서는 김해 지역의 철기를 바탕으로 가락국을 세웠고, 진한에서는 달천철장의 철을 기반으로 석탈해가 신라의 왕권을 잡았고, 백제의 근초고왕이 왜에 보낸 칠지도(七支刀)를 통해 백제의 앞선 제철기술을 보여 줬듯이 국가의 흥망성쇠도 철과 관련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문헌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과 『후한서(後漢書)』에는 ‘한(韓), 예(濊), 왜(倭) 모두가 변진(弁辰)에서 철을 가져가며, 모든 시장에서 철을 (화폐처럼) 사용하니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해, 철이 당시의 화폐경제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문헌에 달천철장이 등장하는 시기는 조선시대 세종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1452년 달천에서 생산된 철 12,500근이 수납됐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곳에서 인근에 약 50여곳의 쇠부리터에 토철을 공급해 줬는데, 경주 황성동의 제철유적에서 출토된 철의 비소(As) 함량을 통해 이 또한 달천에서 공급됐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돼 달천철장의 역사적 중요성을 더해준다.

‘철강왕’이라고 하면 누가 떠오르나요? 라고 물으면 주로 ‘카네기’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가 있었다면 조선에도 철강왕 ‘구충당 이의립(求忠堂 李義立)’선생이 있었다.
카네기가 쉽게 녹는 철을 대체할 강철을 개발해 이룬 부를 미국 사회에 환원하고자 설립한 자선기구와 아낌없는 기부로 존경받았던 ‘미국의 철강왕’이었다면, 구충당은 양란(兩亂)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의지로 10여년 동안 철을 찾아 팔도를 누비다가 달천철장을 재발견하고 2년간 철 제련법(製鍊法)을 스스로 터득해 병기와 농기구를 나라에 바친 공이 인정돼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라는 지위를 하사 받은 ‘조선의 철강왕’이었다. 바야흐로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인 오늘날에도 그들처럼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는 인물이 나오길 기대한다.

 

‘달천철장 관리시설’은 해방이후 1964년부터 2002년까지 운영됐던 달천철장의 역사와 세계 철의 연대표, 옛날과 지금의 철 제조공정 비교, 영상 상영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햇살 좋은 날, 어쩌면 그곳에서 또 다른 미래 문화와 조우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철 문화의 흔적을 찾아 ‘달천철장 관리시설’을 방문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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