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얻은 자유시간 무의미하게 보내 아쉬워
‘구속의 시간’으로 바꾸면 작품 몇편 쓰지 않을까
 올 정초 다짐 ‘작지만 확실한 행복’ 주리라 믿어

임일태 수필가

지인으로부터 원고 청탁 전화를 받았다.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흔쾌하게 승낙을 하고나서는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구속을 택했다싶어 마음이 짠했다. 오랫동안 갈망하다 얻은 자유 시간을 이 년도 못되어 포기하고 구속을 택한 것은 공간과 달리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직장을 다닐 때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지만 늘 부족한 것은 시간의 자유였다. 없는 짬을 내 해본 취미활동은 갈증만 더할 뿐 성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퇴직 후에는 무제한의 여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은근히 정년이 되기를 기다리기 까지 했다.
은퇴생활도 연습이 필요할 것 같고, 하고 싶은 일들을 모아둘 공간도 필요할 것 같아 서둘러 텃밭부터 마련했다. 채소와 꽃도 가꾸고 유실수와 정원수도 심고 움막이라도 지으면 글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나만을 위한 공간에서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신나는 일이었다.

기다리던 날은 빨리도 왔다. 퇴직의 섭섭함을 자유를 얻는다는 기대로 상쇄돼 덤덤하게 맞은 정년퇴직이었다. 출근할 곳이 없어진 허전함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미리 마련해 뒀던 공간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이 서로 밀치고 다퉈 나타날 것만 같았는데 그 많던 것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원했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조차 가물가물하다. 행복을 상상했던 공간은 남아있는데 시간들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자유롭게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세상 제일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슬픔으로 다가 오는 지. 시간에서 자유롭다는 것과 시간이 남아돈다는 것이 동의어이고 시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용도 폐기된 퇴직자라는 생각이 미치자 걷잡을 수 없는 박탈감이 밀려들었다. 시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소속이 없다는 것이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에 따르면 생리적 욕구, 안정의 욕구,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존경의 욕구와 마지막으로 자아실현의 욕구다. 하위의 욕구가 충족된 후라야 그 다음 단계의 욕구가 일어난다고 한다. 애정의 욕구도 상대와 서로 소속감을 공유하기에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를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나름의 해석도 해본다.

두 번째 단계에서 멈춰 버린 욕구를 세 번째 단계인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스스로 구속을 선택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은 어떤 것이라도 지을 수 있는 빈 땅을 가진 것과 같다. 시간과 공간의 자유, 둘 다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은 사용하지 않으면 남아 있지만 시간은 지나가버리면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차이가 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을 유효하게 사용할 수만 있다면 마지막 단계의 욕구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이룰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시간이 유의미로 바꾸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불확실한 큰 가능성과 확실한 적은 가능성의 교환하는 심정으로 스스로 구속을 택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자유는 권리이고 자산이지만 구속은 부담이며 부채다. 권리와 자산은 포기할 수 있지만 부담과 부채는 지불해야할 의무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피하게 되는 게으른 나에게 무제한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지만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그 것 때문에 차라리 부담이나 부채를 가지는 편이 나을 성 싶다. 혼자 하는 다짐보다 남과 더불어 하는 약속이 지켜질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이 년이 다되도록 사용하지 못하고 흘러 보낸 시간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자유 시간은 구속의 시간으로 바꾼다면 올해는 졸 작품 몇 편이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올해 정초에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구속을 택한 이유이고 다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구속이 나에게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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