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쓰는 언어가 더욱 진솔하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나의 걸음은 또한 도심이나 

강가를 넘어서 문장 속을 향한다

 

김감우 시인

춥지 않은 겨울이었다. 덕분에 태화강을 자주 걸을 수 있었다. 겨울 태화강의 새벽은 한 가지 色이고 한 가지 音이다. 옷 벗은 나무가 가지마다 어둠에 싸여있는 풍경이 곧 音이고, 강물 위로 어둠 흐르는 소리가 곧 풍경이 되는 시간이다. 겨울 강가는 여름처럼 붐비지 않는다. 나무도 풀도 길바닥도 모두 제자리를 지키며 내면과 대화삼매경에 빠져있는 모습을 본다. 그럴 때는 나의 발소리 역시 조심스럽다. 강가에서는 시간도 살아있는 생명체다. 어둠이 조금씩 물러나고 그 자리로 빛이 들면서 시간의 숨소리가 점점 속도를 내는 것을 느낀다. 강물 위를 덮고 있던 고요가 몸을 뒤집으며 기지개를 켠다. 그 변화하는 순간에 귀를 대면 거기에 밑줄을 긋고 싶어진다. 아니 자세히 들어보면 누군가가 이미 굵게 그어놓은 밑줄이 출렁, 강물 위로 모습을 보인다. 무수히 많다. 물결이 그 힘으로 깨어나는 것 같다. 이처럼 겨울 강을 따라 걷는 일은 짧은 시간이라도 오붓한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나에게 걷는 일은 운동 이상의 의미다. 생각이 체한 것처럼 순환되지 않고 거북한 때가 있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부유물로 몸과 마음이 서로 부딪치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는 조금 빠르게 걸어주는 것이 좋다. 
 

다비드 르 브르통이 쓴 <걷기 예찬>이 나온 지 이십 년이 되어간다. 그 책이 우리의 생활패턴을 바꿔 놓았다고 생각한다. 거리마다 걷는 사람들의 물결을 본다. 어떤 때는 사람들 사이로 길이 걸어가는 것 같다. 올레길 둘레길 등 걷기를 위한 길이 생기고 운동화 패션이 유행을 하는 것을 보면, 걷는 일이 요즘처럼 호강을 받은 적이 있을까 싶다. 

새해 나는 조금 빠르게 걷기로 결심했다. 늘 보던 풍경에서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내고 싶다. 발이 쓰는 언어가 더욱 진솔하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나의 걸음은 또한 도심이나 강가를 넘어서 문장 속을 향한다. 빠르게 또는 느리게. 

“우리가 뱉는 말이야말로 날마다 매시간 내보내는 광고다” 경제 잡지 <포브스>를 창간한 B. C. 포브스의 말이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이 말을 책 <카피 공부>에서 읽는다. 1060개의 짤막한 문구로 이루어진 이 책은 광고인들에게는 경전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언어를 사용하여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이들에게도 깊게 생각하고 잘 담아내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이 책 속을 걷는 일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재미있고 유쾌하다. 생기 넘치는 속도로 휘몰아치다가 어느새 고요하고 깊은 세상을 펼쳐 보이기도 한다. 

시 공부 중에 이 책이 선물로 왔을 때 처음엔 의아했으나 “더 적은 말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라고 책날개에 적힌 광고문구가 나를 확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 후로 자주 이 책의 글자 사이에 와서 걷다가곤 한다. 책 속의 내용은 참으로 다양하다. 시적 은유와 낯설게 하기가 있는가하면 삶의 철학이 압축되어 있기도 하고 상품의 판매 전략이나 광고회사와 클라이언트와의 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제시된 글도 있다. 간결하고 명료하다. 그래서 파들파들 살아있고 그래서 매우 엄격하다.
 

책 속에서 저자가 불러내어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즐겁다. 그들의 말을 옮기기만 해도 하나의 메시지가 되어 나를 자극하고 느슨한 내 정신을 툭하고 쳐준다. 

시를 쓰는 일은 ‘대하의 강물을 작은 종지에 담는 일’이라는 가르침에 전율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책 속에서 다시 그 뜻을 만난다. 이 책 속에 여러 내용 중 나를 오래 붙잡는 것은 당연히 언어의 부림과 사유에 관한 부분이다. 카피를 쓰는 것과 시를 쓰는 일이 서로 유사성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이 책을 나에게 준 뜻이 새롭게 사유하고 간결하게 담아내라는 詩作에 관한 조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은 언어는 없다. 죽은 생각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흔히 시에서 클리세라 부르는 표현들은 죽은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고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올해의 목표는 살아있는 걷기, 다양한 길을 걷고 다양한 책 속을 걷는 일이다. 그래서 발이 말하는 언어를 받아서 적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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