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병들의 낙서가 다수 발견된 통도사 대광명전. 사진제공 영축총림 통도사, 이병길 보광중 교사.
대광명정의 이별의 낙서 시. ‘가노라 通度寺(통도사)야 잘 있거라 戰友(전우)들아, 情(정)든 通度(통도)를 두고 떠나랴고 하려마는,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 갈 수 밖에 더 있느냐’라고 쓰여져 있다. 사진제공 영축총림 통도사, 이병길 보광중 교사.
대광명전의 단기 4284년 낙서. ‘4284년 5월 29일 도착하여 6월 12일 떠나간다’고 쓰여져 있다. 사진제공 영축총림 통도사, 이병길 보광중 교사.
‘4284년 6월 10일 평양’이라고 적힌 대광명전의 단기 4284년 낙서. 사진제공 영축총림 통도사, 이병길 보광중 교사.
대광명전의 단기 4284년 낙서. ‘단기 4284년 4월 29일 퇴원자 출발’이라고 쓰여져 있다. 사진제공 영축총림 통도사, 이병길 보광중 교사.
대광명전 외벽의 탱크(위)와 트럭 그림. 사진제공 영축총림 통도사, 이병길 보광중 교사.
   
 
  ▲ 대광명전 외벽의 탱크(위)와 트럭 그림. 이병길 보광중 교사 제공.  
 
   
 
  ▲ 대광명전의 단기 4284년 낙서. ‘단기 4284년 4월 29일 퇴원자 출발’이라고 쓰여져 있다. 이병길 보광중 교사 제공.  
 
   
 
  ▲ ‘4284년 6월 10일 평양’이라고 적힌 대광명전의 단기 4284년 낙서. 이병길 보광중 교사 제공.  
 
   
 
  ▲ 대광명전의 단기 4284년 낙서. ‘4284년 5월 29일 도착하여 6월 12일 떠나간다’고 쓰여져 있다. 이병길 보광중 교사 제공.  
 
   
 
  ▲ 대광명정의 이별의 낙서 시. ‘가노라 通度寺(통도사)야 잘 있거라 戰友(전우)들아, 情(정)든 通度(통도)를 두고 떠나랴고 하려마는,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 갈 수 밖에 더 있느냐’라고 쓰여져 있다. 이병길 보광중 교사 제공.  
 
   
 
  ▲ 부상병들의 낙서가 다수 발견된 통도사 대광명전. 이병길 보광중 교사 제공.  
 
   
 
  ▲ 통도사 용화전 미륵존불 갱(更) 조성 연기문(1952). 이병길 보광중 교사 제공.  
 
   
 
  ▲ 통도사 비로암 원명 스님. 이병길 보광중 교사 제공.  
 
   
 
  ▲ 성천마을의 김두형 어른(1934년생, 보광중 3회). 이병길 보광중 교사 제공.  
 
   
 
  ▲ 성천천마을의 안정철 어른(1932년생, 보광중 2회). 이병길 보광중 교사 제공.  
 

올해 한국전쟁(6·25) 70주년을 앞두고 양산 통도사에 제31육군병원이 존재한 사실을 뒷받침 하는 자료가 대거 발견됐다. 당시 상이군인(부상병)이 통도사 대광명전에 남긴 낙서가 확인된 건데, 지난해 9월 ‘통도사에서 한국전쟁 때 제31 육군병원 분원 또는 제31 육군 정양원 분원이 설치됐다’는 기록에 이은 새로운 역사적 자료로 의미가 깊다. 조국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총 들었던 부상병들의 이야기는 70년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우리 곁에 남겨져 있었다. <편집자주>



# 못과 연필로 끄적거린 낙서에는 ‘퇴원·전우’ 언급, ‘탱크’ 그림…당시 부상병 상황 담겨

21일 통도사와 지역사 연구가인 이병길 양산 보광중학교 교사는 “통도사가 한국전쟁 당시 육군병원 존재 관련 연구에 다각적 노력을 기울인 결과, 올해 3월 말 대광명전에서 부상병들이 남긴 낙서들을 발견했다”며 “병원이 있다는 연기문(緣起文, 중생의?지혜로?이해할?수?있는?정도로 설법한 글)은 나왔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각적 자료는 이번이 처음이다”고 밝혔다.

통도사가 지난해 9월 용화전 미륵불소조좌상의 복장유물 확인 과정에서 ‘용화전 미륵존불 갱(更) 조성 연기문’을 발견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증거는 여태껏 없었다. 이 연기문은 통도사 구하스님이 1952년에 붓글씨로 쓴 것으로 ‘경인년 6월 25일 사변 후 국군 상이병 3,000여 명이 입사(入寺)하야 불기 2979 임진(1952년) 4월 12일에 퇴거(退去)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통도사 등에 따르면 이번에 발견된 낙서는 크게 3개 종류다. 단기 4284년(1951년) 관련 글, 탱크와 트럭 그림, 퇴원을 하면서 남긴 시 등이다.

우선 단기 연도 낙서는 총 3개로 ‘4284년 5월 29일 도착하여 6월 12일 떠나간다’ ‘단기 4284년 4월 29일 퇴원(退院) 상자(傷者) 출발(出發)’이라는 문구가 못과 연필로 각각 쓰여 있었고, 대광명전 나무 기둥에는 ‘4284년 6월 10일 평양’이라는 문장이 칼로 새겨져 거칠게 남아있었다.

특히, 그림 낙서는 통도사에 군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자료 중 하나다. 전쟁에 사용되는 탱크, 트럭 그림이 대광명전 북쪽 외부 마지막 칸에서 발견된 것이다. 아이 얼굴을 비롯해 모자, 모자 쓴 얼굴, 건물 그림 등도 있었다.

이름 모를 한 부상병이 퇴원하며 남긴 시 구절도 당시 육군병원이 통도사에 존재했음을 증명했다. ‘가노라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들아/ 정든 통도를 떠나랴고 하려마는/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 갈 수밖에 더 있느냐’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는 가련다’ ‘전우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통도사에 이별한다’ 등이다. 낙서 중에는 ‘停戰(정전)이 웬 말?’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1951년 7월 정전 반대 궐기대회가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일어난 것을 감안하면 이 시들은 군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사랑하는 오빠’ ‘이름 이창규(李昌奎), 진기준(陳基俊), 김정례(金貞禮), 김순동(金舜東)’ 등이 발견됐지만, 이들이 상이군인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외부 벽에는 ‘경주군 강동면 왕신리 김해 김병찬 임신(壬申, 1932년) 3월 초 8일 유람(遊覽) 차(此) 사(寺)’라는 문구도 발견됐다.

이 교사는 “단기 연도가 1951년 4월, 5월, 6월에 집중된 대광명전 낙서는 통도사에 육군병원이 있었다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증거이자, 군인이 아니면 남길 수 없는 객관적 증거”라며 “천만다행으로 한국전쟁 발발 7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대광명전 보수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다수의 낙서들이 발견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 “숨진 군인들은 통도사 화장터에서 화장됐다”…노스님과 지역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

실제로 지역 주민들과 통도사 노스님들은 한국전쟁 때 통도사 전각마다 부상병으로 가득 차고, 군인들이 암자 꼭대기에서 보초를 선 것은 물론 사망자들은 통도사 화장터에서 화장됐다고 증언했다.

“스님들은 법당에 있었고, 환자들이 있는 곳에는 학생들을 출입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했다. 사망한 부상병들은 들것에 실려 학교 앞이나 선자바위까지 옮겨져 진 후, 마스크를 쓰고 M1 소총을 착검한 군인들이 통도사 화장터에 가서 화장했다. 일부 상이군인은 마을 여자와 결혼했다”(안정철, 1932년생, 보광중 2회) “갑자기 들여 닥친 환자들에게 교실을 빼앗긴 학생들은 통도사의 만세루, 명월료 등에서 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김두형, 1934년생, 보광중 3회). “점점 부상자들이 많아지므로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하였던 취운암도 환자 병동으로 사용했다”(김학조, 1933년생, 보광중 3회) “휴전이 진행되는 시기에 환자들은 통도사 경내의 전각에 수용하게 됐다”(류득원, 보광중 4회).

1952년 출가한 통도사 전 방장 원명스님은 “당시 통도사 원주실 근처 외양간에 머슴들이 자는 방에 일암스님과 만암스님이 사셨다. 다른 스님들은 절에서 군인들에 의해 쫓겨났다”며 “군인들이 사망하면 한꺼번에 화장터에서 태웠다”고 전했다.

1950년 출가해 전쟁 당시 통도사에서 수련한 오어사 원효암 종원스님은 “대웅전과 노전, 별당을 제외한 모든 전각에는 환자들이 있었다”며 “보광전에 폭탄(종)을 걸어놓고, 신평마을에서 밤에 40여 명이 와서 보초를 서고, 군인들은 남산(5층 사리탑)과 안양암 꼭대기에서 뭔가 움직이면 총을 쏘고 했다”고 회상했다.

이에 대해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은 “한국전쟁 70주년인 올해 부상병들을 위해 도량을 제공한 통도사의 역사적 사실을 복원해 널리 알려나갈 것”이라며 “향후 정부에서 통도사 육군병원 존재 사실을 인정하면, 내년에 부상병들을 기리는 천도재를 봉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제31육군병원(육군정양병원)은 1950년 12월 대전에서 창설된 부대로,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이전해 동래 들판에 국방색 천막을 치고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부상병이 증가하자 양산 통도사와 부산 범어사에 정양원을 각각 설치했다. 1951년 1월 25일자와 3월 3일자 동아일보에 동래 정양원 개소 소식과 이승만 대통령이 통도사 분원에서 치료를 받는 상이장병에게 양말 1,600켤레를 전달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사진=이병길 보광중 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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