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비 때마다 힘이 돼준 고마운 ‘산’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 시작되면서
산에 오르니 잊었었던 소중함 다시 느껴

이강하 시인

비가 내리는 소리에 감정이 솟구치는 것은 아직은 우리가 웅덩이에 고인 빛이 아니라는 것일 테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의 아침. 이렇게 비 내리는 날에는 따뜻한 차를 들이키면서 잠깐만이라도 물방울의 세계를 탐닉하는 것도 괜찮다. 구겨진 빛을 꺼내서 계속 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여전히 나의 몸에는 초록빛 씨앗이 움트고 있다는 것일 테다.

어제는 누군가를 가엾게 여기고 오늘은 누군가를 한없이 미워하는 것도 아직은 우리의 근육이 병들지 않았고 결코 늙을 수 없다는 것일 테다. 이 비 그친 후 주말이 되면 너와 나는 또는 누군가는 물고기를 찾아 바다로 또는 나무와 식물을 찾아 산으로 향하겠지요. 미래가 된 물방울의 나라, 숲으로 향하는 가벼운 발걸음이겠지요. 나무에게 새에게 어제보다 더 많은 말을 들어보겠노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지요.

무작정 산을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다. 조건 없이 산을 사랑했던 그때의 나의 산은 지금보다 웅장하고 높았다. 다리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정직하고 아름다운 노을의 뒷모습처럼 빛났다. 나는 돈이 많은 공무원과 선을 본 경험이 있다. 그의 말 속에는 권력과 교만함이 엿보였다. 돈보다는 산을 좋아한 지금의 남편을 선택했다. 주중에는 서로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고 우리는 주말마다 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족으로부터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그가 좋았다. 어제를 반성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산은 희망이었다.

그는 가난했고 나도 가난했고 그의 부모님도 아프셨고 나의 부모님도 아프셨다. 그러나 나는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쌀이 떨어지면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나는 그의 성실함을 끝까지 믿었다. 회사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했으나 경제위기는 반복적이었다. 여름마다 빚이 늘어났다. 힘들 때마다 항상 우리 편이 돼준 고마운 산이 있었기에 지금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은 아이가 다섯 살 때였을까. 아이가 무섭다고 바위 아래에서 엉엉 울었다. 그는 아들의 몸 절반을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신불산 정상까지 올랐다. 그때는 그렇게 그도 나도 힘이 넘쳐났다. 내가 완전히 건강이 나빠졌을 때에도 ‘돈은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 돈, 일보다는 건강이 먼저라는’ 말로 나를 오래 위로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없으면 무시당하는 세상이 됐다. 돈이 없으면 건강도 지키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참 슬픈 세상이 돼가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얼마 전에도 남편을 따라 뒷산에 갔었다. 속도가 느려서 미안할 때도 많지만 그는 나의 상태를 이해한다. 유명산만 고집하는 그였으나 이제는 그의 몸도 예전 같지가 않다. 산에 둘러싸인 마을에서 태어나서 그럴까. 그래서인지 산에 있을 때만큼은 서로 행복하다. 비탈을 벗어나 편안한 능선을 걸을 때는 가벼운 깃털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앞뒤가 아닌 옆으로 나란히 걸으면서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더 그렇다. 경사가 심한 오르막에서 내가 힘들다고 할 때는 바로 그늘에 앉아 물을 마시게 했다. 그리고 재밌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일은 당신의 몫이라고 어색한 농담을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신불산이 되거나 태화강이 되거나 지리산이 되기도 한다. 각자 맡은 준비물을 준비해서 산으로 올라가는 과정이 좋았기에 도착지점은 더 아름답다.

땀을 흘리며 정상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본다는 것, 그것은 그 어떤 글로 표현하지 못할 그림이다. 여전히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왜 당신은 지척에 보물을 두고 왜 멀리를 고집했을까 왜 굳이 당신은 가까운 나를 모른 체 하고 어렵게 날짜를 잡고 먼 산만 사랑해야만 했을까 이러한 나의 엉뚱한 질문은 그를 한바탕 웃게 했다. 코로나는 이렇게 나와 너 사이에서 또는 가까운 산, 먼 산 사이에서 그동안 소홀했던 관계를 되돌아보게도 했다.

오후가 되니 동대산의 하늘이 맑아졌다. 구름 한 점 없다. 정자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쪽빛이다. 나는 잠깐 펜을 놓고 기도를 한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우리나라와 세계의 경제가 어서 안정되기를. 그리고 이종섶 시인의 짧은 詩,「억울하지 않는 계절」을 천천히 읽어본다.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수한 물고기 떼들 투명해서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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