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 울산문인협회 사무국장

어릴적 넉넉한 그늘 내어주던 그리운 소나무
추석연휴 삼맷골 찾아 두팔로 앉고 귀붙이니
 몇백년간 한자리 지켜준 만지송에 정 느껴져

‘만지송’은 사십 년 전, 우리 놀이터였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늘 그리웠던 곳이다. 그리운 만큼 나무의 형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산 능선에 큰 소나무 하나가 멀리서도 잘 보였다. 
길도 알고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옛길도 더 넓혀져 가는 길도 어렵지 않았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한눈에 알아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지나칠 뻔했다. 
고향 마을에서 골로 오 리쯤 걸어 산으로 올라가면 ‘삼맷골’이라는 곳에 수령이 삼백 년이 넘은 만지송이 있다. 우리는 ‘만지소나무라고 불렀다. 만지소나무는 멀리서도 돋보였다. 가지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 만큼 나무 그늘도 넓었다. 날마다 소를 몰고 와 풀을 뜯어 먹게 해놓고 나무 그늘에서 어둑해질 때까지 온갖 놀이를 하며 놀았다. 
나무에 오르길 좋아했던 나는 다람쥐처럼 소나무 가지에 앉아 하모니카도 불었다. 하모니카를 불다가 나무둥치에 기대 눈을 감으면 가지를 훑고 지나가던 바람이 토닥였다. 피부에 와 닿던 솔바람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듯하다. 
청송 보호감호소도 만지소나무 위에서 내려다보였다. 멀리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감호소는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였다. 그들이 훈련을 받는지 가끔 우렁찬 구령 소리도 들렸다. 구령 소리는 우렁찼지만, 왠지 우리는 그 소리에 마음이 아렸다. 어린 마음에도 그들에게 연민이 생겼던 모양이다. 
도회지로 나와 생활하는 동안 마음속에는 언제나 넉넉한 그늘을 주던 소나무가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 고향에는 갔지만, 한 번도 그곳에 가보질 못했다. 언젠가는 찾아가 봐야지 하는 생각만으로 세월이 흘렀다. 
고향 친구들과 만나면 늘 만지소나무 이야기를 했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들과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은 조금 해소되었다. 이야기 끝에는 한결같이 언제 한번 가보자며 약속했다. 그러나 친구들과 같이 갈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번 추석에 고향에 갔다. 코로나 19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조심해야 했다. 예전 같으면 이곳저곳을 다니느라 바빴겠지만 별로 할 일이 없어 밤이나 주우려 가볼까 하고 집을 나섰다. 골을 따라 들어가다 ‘삼맷골’로 들어섰다. ‘삼맷골’ 입구부터 밤나무들이 많아 밤을 주우며 점점 산 위로 올랐다. 여기저기 약초가 보여 캐고, 잡버섯도 따며 산을 오르다 만지소나무 생각에 찾아 나섰다. 
산으로 오를수록 숲이 깊어 방향이 헷갈렸다. 한참 걸어도 만지송은 쉽게 나타나질 않았다. 그때부터 기억에 자신이 없었다. 주위의 소나무들 키가 세월의 흔적만큼 커버렸다. 예전에는 주위 나무들은 땔감으로 모두 베어버려 훤했던 모양이었다. 지금은 땔감으로 나무를 베는 일이 없으니 숲이 무성했다.
다행히 같이 간 오빠가 소나무를 발견했다. 오빠가 가리키는 곳으로 올라갔다. 내 마음속의 만지송은 한 장의 사진으로 늘 똑같은 모습이었다. 들판에 홀로 부채처럼 펼쳐져 우뚝 서 있었다. 그런데 내 앞에 서 있는 나무는 기억 속의 만지송이 아니었다. 주위에 나무들로 둘러싸여 돋보이지도 않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모양이다. 굳건한 바위도 비바람에 깎이고 조금씩 침식되며, 영원하리라 믿고 맹세했던 사랑도 세월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련도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지 않던가. 이 코로나 시국도 세월이 흘러 세상이 변해 평온해지는 날이 오겠지 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가까이 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두 팔로 나무를 안고 귀를 붙였다. 몇 백 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준 만지송에 정이 느껴졌다. 
만지송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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