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무엇을 했나
 울산의 추억은...

 

회상록 ‘뭐하러 왔노’는 필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74년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던진 삶의 화두(話頭)라고 얘기하고 싶다. 또 짧게는 어느날 울산에서 다시 삶을 시작한 다음 스스로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되물어 본다는 얘기다. 시기에 구애 받지 않고 그때 그때 기억을 더듬어 주제를 정해 회상해보기로 한다.

 

배호 화백

 

‘어머니 심부름으로 이세상에 왔다가…돌아간다’
‘괜히 왔다 간다’는 말 남기고 세상 떠난 걸레스님
‘거짓말을 하려면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나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니 심부름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조병화 시인은 생전에 시 ‘꿈의 귀향’을 발표하면서 묘비명으로 삼겠다고 했다.
행복했던 때를 그리워하는 것보다 더 큰 괴로움은 없다. (A 단테)

‘옛 이야기랑 주고 받으며/ 엷은 광선의 황혼을 걷는다/ 가로수 사잇길에/ 수다한 추억을 묻으며/ 가을이 오는 어느날’ (추은희/ 산책)

‘나는 옛 일을 생각하면 슬퍼지지만 역시 회상하는 것은 기쁜일이다’ (J.W. 괴테)

회고록은 자신을 처형대에 올려 놓을 만한 배포와 용기와 그리고 겸손이 있을 사람만이 써야할 것이다. 누가 뭐라해도 진실만을 얘기하고, 누가 뭐라해도 사실을 축내지 않고, 누가 뭐라해도 자신의 가면을 벗을 수 있는 사람만이 회고록을 쓸 자격이 있다.
거짓말을 하려면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프랑스 속담)

건망(健忘)-기억력이 부실하여 잘 잊음. 종이에 쓰지 말고 마음에 써 두라.
회상(回想)-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 그생각.
회고(回顧)-과거를 돌이켜 봄. 옛 일을 생각함.
회고(懷古)-옛 자취를 돌이켜 생각함.

‘기억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흔히, 혹은 가볍게 쓰는 표현이다. 기억은 실체도 없고 지난 일이니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쓱쓱 지워내서 잊으면 된다.

실체 없는 기억이 실체 있는 현실을 지배하면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기억을 매우 중시했다. 기억의 흔적이 표면상으로 보이지 않아도 그 심층부에는 남아 있다고 했다.
우리가 밀랍종이 위에 글씨를 쓴다고 치자. 종이를 치워도 글자는 종이 아래에 새겨져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 밑에는 모든 것이 보존된다. 지워진 것 같지만 마음 구석에 남아 있는 그것을 프로이트는 ‘기억의 근원’이라고 했다. 어느 누가 기억을 헛되다고 할 수 있을까.

정신의학적으로 ‘기억’은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과 정보를 뇌의 특정 부위에 기록한 뒤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적절히 꺼내서 사용하는 능력이다.

인류는 다른 생명체보다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위기 상황에서도 현명하게 행동해 지구촌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경험도 좋은 일, 나쁜 일이 있으며 감정이 실리는 상황도 있고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인간의 뇌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면서 고통스러운 감정에서도 벗어나는 방향으로 기억을 활용한다. 

예컨대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면 상황 그 자체는 뇌에 기록도 되고 저장도 된다. 하지만 괴로운 상황을 기억하기 싫은 마음이 너무 커지다 보면 일정 기간 그 사건을 회상하는 기능이 마비된다. ‘심인성 기억 상실’이 발생하는 이유인데 어느 순간 모든 기억이 전부 되살아난다. 

‘기억착오’는 심리적 고통 없이 자신의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거짓된 내용을 기억하는 상태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꾸며서 메우는 작화증(作話症·Confabulation),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만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회상성 조작(Retrospective falsification) 등이 있다.   

기억은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통상 신나는 기억이나 슬픈 기억은 뇌에 쉽게 기록되고 저장도 잘돼 오랜 세월이 흘러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고통의 순간을 잊으려고 노력해도 끊임없이 떠올라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 이유다. 

기억을 회상하는 과정에도 감정이 관여하는데, 통상 우울할 때보다는 즐거울 때 기억을 떠올리기가 쉽다. 기억력을 극대화해 학습 능력을 높이고 싶다면 연령과 상관없이 항상 즐거운 상태를 유지하는 게 유리하다. 

일상에서 접하는 가장 흔한 기억력 문제는 의식적으로 진실을 부정하는 거짓말이다. 진실을 인정하고 본인의 치부가 드러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다. 때론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가 자신의 주장이 기억 장애 탓인지 거짓말인지를 혼동하기도 한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외국 작가로 꼽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편소설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적 심층부에 있는 전생의 기억을 주제로한 작품이다. 상식의 세계에서 전생이나 전생 체험은 ‘신비주의’, ‘가짜기억’ 혹은 ‘정신 착란’으로 이해 된다.

하지만 베르베르는 한 사람이 가진 수 많은 전생의 기억들이야말로 그의 진짜 정체성과 인류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해  낼 수 있는 통로라는 독창적인 상상력에 착안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걸레스님 중광(重光)은 “괜히 왔다간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대자유인이다.

그는 선화(禪畵)를 비롯해 추상과 구상을 넘나든 그림, 도자, 붓글씨 등을 남겼다. 조계종 승려로 출발했으나 1979년 승적을 잃었다.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거다”라는 말대로 종단에서나 화단에서나 아웃사이더의 길을 선택한 그에 대한 생전의 평가는 크게 엇갈렸다.

아무 옷이나 가리지 않고 입고 다니며, 화폭에 붓을 내던지는 것이 걸레질이라며 쓸고 닦으며 살았다. “죽거들랑 가마니에 둘둘말아 새와 짐승이 먹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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