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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가을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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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동우 한국언론진흥재단·작가
  • 승인 2020.12.03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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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녹음 자랑하던 여름 꿈처럼 아득
시골 집 포도나무에 매달린 마지막 한 잎
모든 것 내준 그 모습처럼 사랑하고 싶다

이동우 한국언론진흥재단·작가


가을의 끝자락이다. 거리의 가로수들도 나뭇잎을 모두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다. 가지만 남은 나무는 쓸쓸하다. 짙푸른 녹음을 자랑하던 여름이 마치 꿈 인양 아득하다. 나무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초록 잎이 돋아나던 봄과 푸른 잎이 무성한 여름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쓸쓸한 거리를 걷는다. 며칠 전만 해도 낙엽이 꽤 쌓여 있었는데 어느새 말끔히 치워져 있다.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이리 저리 뒹굴던 낙엽은 자루에 담겨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다. 저 낙엽들은 어디로 갈까. 낙엽들을 한 곳에 모아 태우는 곳이 있을까? 거름으로 만들어 농사를 짓는데 사용하면 좋을 텐데. 낙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건 어떨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는다. 집을 떠나 자취를 하던 고등학교 시절, 땔감이 없어 산에 올라가 솔잎을 긁어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고향집의 어머니도 솔잎을 모아 두었다가 불쏘시개로 사용하곤 했다. 그 시절 산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많았다.

가을을 걷는다. 대학교 시절, 남몰래 흠모했던 여학생은 가을을 닮았다. 그 여학생은 말이 별로 없었다. 혼자 조용히 앉아 수업을 들었고, 수업이 끝나면 혼자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 나갔다. 그녀의 얼굴은 우수에 차 있었고 눈동자는 깊고 고요했다. 한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매고 혼자 교정을 거니는 그녀의 모습은 쓸쓸했다.
낙엽이 모두 떨어진 어느 늦가을, 학교 앞 커피숍에서 그녀와 커피를 마셨다. 그녀와 단둘이 커피를 마신 건 그때가 처음이다. 우리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DJ에게 노래를 신청하고 함께 음악을 들었다.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숍을 나와 헤어졌다. 좋아한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낙엽 떨어진 거리를 걸으며 가을숙녀라는 말이 그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의 가을을 걷는다. 사람들이 무심히 곁을 스쳐 지나간다. 발걸음이 유등천으로 향했다. 천변엔 갈대가 무성하다. 갈대가 바람에 바스락거린다. 그 소리가 가을의 쓸쓸함을 더해준다. 바스락거리는 갈대 사이로 참새가 날아다닌다. 바람만이 간신히 지날 것 같은 작은 틈새로 포드득 날아다닌다. 포드득 날갯짓을 하다가 갈대위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갈대가 제 몸을 흔들며 참새를 반긴다.
유등천변의 나무에는 아직 몇 개의 나뭇잎이 남아있다. 위태롭게 가지 끝에 매달려있는 갈색 나뭇잎이 애처롭고 슬프다. 가을이 슬프고 외로운 건 낙엽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명력을 잃어가는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낙엽을 보며 인생무상을 떠올린다. 가을은 슬프고 외롭고 고독하다.

올 봄에 시골집 마당에 포도나무 묘목을 심었다. 닷새마다 서는 시골장터에서 묘목을 구입했다. 묘목을 파는 사람은 포도나무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열매가 열리면 세송이만 남겨두고 모두 따내라고 했다. 이식 첫해는 열매를 맺는 것보다 뿌리를 튼실하게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 내년에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포도열매 세송이만 남겨 두었다. 포도가 알알이 송이를 만들기 시작할 무렵 세 송이만 남겨두고 모두 잘라 주었다. 포도나무가 힘들게 뿌리를 내리며 내어준 열매는 달콤했다. 가을이 되자 포도나무 잎이 서서히 변색되기 시작했다. 푸르던 나뭇잎이 갈색으로 물들어 갔다. 갈색으로 물들어 가며 바닥으로 툭 툭 떨어졌다.

잎이 모두 떨어지고 마지막 한잎이 가지에 홀로 매달려 있다. 처마 밑 평상에 앉아 그 모습을 보다가 포도나무에게로 다가갔다. 나뭇잎에는 다양한 갈색이 공존한다. 연하고 진한 여러 갈색들이 함께 있다. 잎의 끝 부분엔 붉은 색도 감돈다. 벌레가 먹은 자리도 보인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포도나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 마지막 남은 한잎마저 떨궈 내고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무한한 사랑. 모든 것을 내어주고 끝내 자신을 내려놓는 희생과 배려. 그렇게 자신을 내려놓고 나무는 겨울을 준비한다. 제 몸으로 오롯이 혹한의 추위를 견디며 고통에 몸부림치며 아련한 기억의 끝을 붙잡고 깊이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그렇게 겨울나무는 봄 나무에게로 간다.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나무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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