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식민지'를 살아온 여성 봉건적 유물∙현대적 모순에 맞서

1933년 출판  `울산군향토지'에 여성 가정생활상 그려
남편에 대한 복종심 강하고 묵묵하게 가정 지키는 사람
어떠한 권위도 주지 않은 채 책임만 강조…혹독한 노동
1936년 도쿄제대 의학부 학생  보고서에 하루 일상 기록

억압적인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 가진 여성들 등장
신식교육 받은 후 `여성해방∙민족해방' 과제로 받아 들여
기록 소략해 이름 석자∙활동 몇 줄 남긴 것이 전부

 

   
 
  ▲ 「乙密臺上의 滯空女, 女流鬪士 姜周龍 會見記」 (『東光』23호, 1931년 7월 5일) 잡지 동광에 실린 강주룡의 사진, 을밀대 위에서 고공농성 중인 모습이다.  
 
   
 
  ▲ 「아, 민태형군의 최후(4)」 (조선일보,1923.11.16.) “순애 같은 악마가 이 세상에 몇사람? 민군의 영혼 앞에 나가 죄를 자백하라”라는 내용을 제목으로 달았고, 본문에는 정순애의 사진을 넣었다.  
 
   
 
  ▲ 대표적 여성잡지인 『신여자(新女子)』에 실린 나혜석의 만평이 매우 인상적이다. 서양식 옷을 입고 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여자를 두 명의 양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앗다 그기집 건방지다. 저거를 누가 데려가나’ 하는 말을 하고 있다.   
 
   
 
  ▲ 정계향교수  
 

“조선여성에게 얽혀져 있는 각종의 불합리는 일반적으로 요약하면 봉건적 유물과 현대적 모순이니 이 양시대적 불합리에 대하여 투쟁함에 있어 조선여성의 사이에는 큰 불합리가 있을 리가 없다.” - 〈근우회 선언서〉 중에서

근우회는 1927년에 결성된, 가장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단체 중 하나이다. 울산에도 지회가 있었다. 근우회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가고 있던 여성의 두 가지 과제로 봉건적 유물과 현대적 모순에 대한 투쟁을 제시했다. 봉건적 유물이란 식민지 이전부터 한국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말하고, 현대적 모순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현실을 가리킨다. 이를 보면 당시 여성들이 ‘두 개’의 식민지를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성 독립운동의 의미를 보려면 먼저 두 개의 식민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1933년에 출판된 『울산군향토지』에는 울산 여성의 가정생활에 대한 내용이 있다. 우선 울산의 부인들은 남편에 대한 복종심이 강하고, 묵묵하게 가정을 지키는 사람이 많다며 긍정적인 평가가 등장한다. 동시에 가정 내 여성의 지위가 낮기 때문에 남편이 집에 없으면 일을 처리하기 힘들고, 어머니로서의 권위가 약하고 교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녀교육이나 가정경제, 위생문제 등이 원활하지 않다면서 문제점을 나열하고 있다.(울산군교육회/한삼건 譯, 『1933년 울산군향토지』, 울산대곡박물관, 2016, 194~201쪽) 여성에게 어떠한 권위도 주지 않은 채 책임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매우 불합리하다.

울산 여성은 가정 내 지위만 낮았던 것이 아니라 가정의 생계를 위해서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을 하기도 했다. 1936년 도쿄제대 의학부 학생들이 울산의 달리 지역을 조사하고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가족 구성원의 하루 일과에 관한 내용이 있다. 어느 가정의 하루를 들여다보자.

58살의 남편은 오전 5시에 일어나 논 주위를 한 바퀴 돌았는데, 기력이 나지 않는 지병이 있어 일은 하지 못하고 방 안에서 누웠다가 앉았다가를 반복하다가 오후 3시에 산보를 하고 다시 방안에 드러누웠다. 37살의 부인은 오전 5시에 일어나 보리밥을 짓고 집안 청소를 하고, 아침 식사 후에는 신정리 방면에 솔가지를 주우러 갔다가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그 후에는 내일 먹을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동네를 2시간 정도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장녀는 5시 반에 기상해서 아침 식사를 돕고, 그 후에는 동생을 돌보거나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고, 오후에는 솔가지의 껍질을 벗기거나 물을 길어 오는 등의 집안일을 도왔다.(조선농촌사회위생조사회 편/임경택 譯, 『조선의 농촌위생』, 국립민속박물관, 2008, 125쪽)

이 가정은 하층의 농가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기력이 나지 않는 지병’에 걸린 남편은 산책 외에는 거의 누워서 시간을 보내고 부인과 딸이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다. 생계를 위한 노동 외에도 집안일과 출산·육아 등 가정의 재생산도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에게 지워진 과중한 노동은 건강 악화뿐만 아니라 유산과 사산·조산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이것은 영유아사망률이 높았던 현실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여성에게 요구된 것은 ‘묵묵히’ 참고 견디는 덕목이었다.

동면에 서말극이라는 여성이 살고 있었다. 서말극의 남편은 첩과 함께 별거하면서 본처인 서말극을 학대하고 집안의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 그러나 서말극은 자신의 부덕을 탓하며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고, 아끼고 저축하며 30년을 참고 살았다. 여느 ‘막장 드라마’가 그러하듯 서말극의 남편은 병을 얻은 후에 본처에게 돌아왔고, 서말극은 그런 남편을 정성스럽게 간호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자 서말극은 1929년과 1933년에 절부(節婦) 표창을 받았고, 1932년 당시 조선총독이던 우가키[宇垣]가 지방을 순시할 때 면담요청을 받기도 했다. 서말극이 이렇게 칭송을 받게 된 것은 여성에게 ‘강요’된 덕목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서말극을 향한 표창은, 울산의 여성들에게 서말극을 귀감으로 삼으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메시지가 굳이 필요 없었던 것이 이미 많은 여성들이 서말극처럼 살고 있었다. 가난한 살림에 5~6명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행상 일을 하던 김오절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고된 노동을 하다가 병을 얻어 사망했다. 김시덕은 한센병에 걸린 남편을 오랫동안 간호하며 동네의 의생에게 치료를 받게 했는데, 결국 그 치료비를 대신해서 의생의 첩이 되었다. 그 외에도 폭력이나 도박, 외도 등 다양한 가정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희생해 가정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실을 불합리하다 생각했던 여성들은 한편에서는 가정제도 개혁을 주장했으나 식민지 사회는 여성에게 결코 너그럽지 않았다. 결혼한 남성과 비혼 여성이 자유연애를 할 경우에도 비난의 화살은 두 사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향했다. 1923년 조선일보의 기자였던 민태형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민태형은 부인이 있었지만 정순애라는 여성과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이별을 비관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민태형을 희대의 로맨티스트로 포장하고 정순애를 악마로 묘사했다. 심지어 신문에 정순애의 사진을 실기도 했다. 당시 울산에서 다른 남성과 데이트를 하던 정순애는 동네 청년들로부터 거센 비난과 욕설을 들어야 했다. 여성들에게 현모양처, 정숙한 여인으로서의 생활이 요구되던 것과 달리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었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식민지의 생활이 암담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변한다. 여성에게 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는 여성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신식교육을 받고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을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였다. 울산에도 그런 여성들이 있었다. 기록이 소략해 겨우 이름 석 자와 활동 몇 줄을 남긴 것이 전부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존재했다. 이들은 1924년 언양여자청년회, 1927년 울산여자청년회, 1929년 울산부인상회, 1930년 울산여자친목회, 그리고 1930년 근우회 울산지회 등 사회운동단체를 만들고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회변화를 이끌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그렇지만 해야 했었던 일제강점기 울산 여성들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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