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 21일 현대중공업은 노동조합을 결성, 사측과의 충돌로 파업에 돌입. 8월 19일 정주영 회장과 이형진 노조위원장의 노사협의가 타결되자 조합원들이 환호하고 있다. ‘현중노조 20년사’에서

 

 

전두환 ‘6·29 선언’으로 노동·언론계 민주화 봇물
노동쟁의 폭발, 경제발전 견인차 중화학공업 강타
언론노조도 탄생…13대 대선 ‘노태우 36.3% 대통령’

 

김병길 주필

범국민적 민주화 투쟁 결과 전두환 정권이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이른바 ‘6·29 선언’이 발표됐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전두환에게 건의하는 형식으로 제안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외에 김대중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 관련 사범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 기본권 신장, 언론 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 8개항을 제시했다.

전두환은 7월 1일 특별담화를 통해 노태우의 6·29 선언을 대폭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아주 잘 꾸며진 한 편의 ‘쇼’ 였다. 6·29 선언은 전두환이 만든 각본에 따라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공작이였다. 

6·29 선언 발표 직후 거리는 축제 분위기 였다. 어느 다방에선 “오늘은 기쁜날 차 값은 무료입니다”라고 써붙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에 서울 시내 석간 가판 신문은 수십만부가 팔렸다.

한편 6월 9일 최루탄을 맞고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던 이한열이 부상 27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7월 9일 장례식을 마친 시신은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운구됐다.

6·29 선언은 노동계에 불을 질렀다. 전국에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봇물이 터져 7·8월 두달 동안 3,000여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노동종합 조직화가 곳곳에서 진행됐다. 1987년 6월에 2,752개였던 단위 노조가 같은해 12월에는 4,086개, 1988년에는 6,142개, 1989년에는 7,783개로 늘었다. 노동쟁의 분출로 198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중추산업이었던 중화학공업 분야를 강타했다.

6·29 이후 언론계는 주간·월간지의 ‘폭로 저널리즘’시대를 맞았다. 폭로기사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민주 언론의 부재, 정보의 부재 속에 과거 공공연한 비밀로만 떠돌던 소위 유언비어성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초엔 제5공화국 이전의 정치 비사들이 폭로되었으나 그 범위가 확대되면서 안기부·보안사·문공부가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언론계의 새 바람을 쉽게 막을수는 없었다. 1987년 7월 14일 이웅희 문공부 장관은 언론기본법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8월 1일 ‘각 시·도 단위 1명씩 주재’를 원칙으로 중앙지 지방주재기자의 부활이 공식 발표 되었다. 그동안 중앙지는 지방뉴스를 편법으로 취재해 왔는데 중앙일보의 경우 ‘이동 사회부’라는 이름으로 7명의 기자가 지방 순회 취재를 해왔다.

언론기본법 폐지와 함께 ‘정기간행물 등에 관한 법률’과 ‘방송법’이 새로 제정되었고 보도지침으로 옥죄던 문공부 홍보조정실과 기자 신분증인 ‘프레스 카드’도 사라지게 됐다.

이런 변화의 물결에 따라 각 언론사에서는 노동조합 결성에 바빴다. 1987년 10월 29일 한국일보 노조 결성에 잇따라 11월 18일 동아일보, 12월 1일 중앙일보가 각각 노조를 결성했다. 12월 9일에는 MBC에 최초의 방송 노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중앙일보 기자 노동조합 탄생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이른바 무노조 원칙의 삼성그룹 산하의 언론사로써, 그룹 최초의 노동조합이 생기게 되었다. 노동조합원 대상은 평기자 부터 차장급 기자까지 였다. 

당시 편집부 차장으로 근무중이었던 필자는 노조 조합원 이면서 회사측으로부터는 압력의 대상인 차장급 이었기에 고초를 겪어야 했다. 후일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부 차장 G 노조위원장 역시 노조원과 사측에 끼어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필자는 퇴근후 집에서 쉬다가 편집국장의 호출로 회사로 불려 나오는 날도 있었다. 

노조설립을 탐탁찮게 생각하는 사측의 편집국 고위 간부들과 총무국장등은 퇴근을 불사하고 노조설립을 저지하느라 입술이 부르틀 정도였다. 특히 차장급 기자들의 향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저지에 나섰으나 당시 분위기를 거스를 순 없었다. 3개월 가까이 사측과의 씨름끝에 12월 1일 드디어 노조결성에 성공했다.

잇따라 12월 16일엔 13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대선을 2주일여 앞둔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5분경, 대한항공 858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 안다만 해역에서 공중폭발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탑승객은 중동에서 귀국하던 근로자가 대부분이었다. 한국인 승객 93명과 외국인 2명, 승무원 20명 등 총 115명이 테러의 제물이 되었다.

12월 15일, 대선 하루전 테러범 중 한명인 김현희가 바레인에서 김포공항을 통해 압송됐다. 10월 7일 북한 김정일이 테러범들에게 “88올림픽 참가 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는 친필 공작 지령을 내렸다고 김현희가 자백했다.

대선을 앞둔 7월 9일 전두환은 김대중의 사면복권을 발표하자 세상의 이목은 누가 야당 대선 후보가 될 것인지에 집중됐다.

9월 12일 김영삼계는 대선 후보로 YS 추대를 선언했다. DJ·YS측 대표가 후보단일화 실무협의회를 구성하고 협상에 나섰지만 양 김의 생각은 평행선을 달렸다. 12월 16일 선거 결과 노태우가 36.3%짜리 대통령이 됐다. ‘민주화 정권’ 쟁취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김이 서로 다투다 물거품이 됐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