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이 묘소  
 
   
 
  ▲ 매일신보, 1937.4.30 : 신문에 수록된 사진은 왼쪽부터 이재유, 이순금, 유순희이다. 이순금의 경우 졸업앨범 사진을 그림으로 그렸다.  
 
   
 
  ▲ '시내 각 여고 생도에 적화사상을 선전' (매일신보, 1932.5.9.) 이순금이 박진홍과 접촉하고 활동한 정황에 대해 보도를 하고 있다.  
 
   
 
  ▲ 정계향 교수  
 
   
 
  ▲ 윤은숙 작가가 그린 여성독립운동가 이순금(1912~)  
 

1.프롤로그

2.울산여성독립운동사를 시작하며

3.울산여성, 식민지를 살다

4.학교에 간 여성들

5.사회로 나온 여성들

6.울산의 여성독립운동가

(1)이순금(1912~?)

(2)이효정(1913~2010)

(3)손응교(1917~2016)



지난 5월 24일 선바위 인근에 자리한 김남이의 묘를 찾았다. 여성가족개발원의 다우리 서포터즈 회원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답사, “울산 여성 독립운동가의 길을 찾아서”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작년에 왔을 때는 주변의 잔디와 풀이 정리가 잘 되어 있었는데, 최근에 방문한 사람이 없었는지 무덤 위에는 새로 자라난 풀들이 무성했다. 울산에 남아 있는 이순금의 흔적은 이제 어머니인 김남이의 무덤 밖에 없는데 사람의 흔적이 닿지 못한 채 남겨진 모습을 보니, ‘월북’을 이유로 그 독립운동마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는 이순금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왠지 씁쓸한 기분이 느껴졌다.



이순금은 1912년 경상남도 울주군 범서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종락, 어머니는 김남이었다. 반제동맹을 이끌면서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관술과는 이복남매 사이였다. 김남이와 이종락은 정식으로 결혼을 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순금은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이순금은 언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김남이는 언양공보 인근으로 식당을 옮겼다. 1928년 이순금이 서울의 실천여학교에 입학하자 김남이는 서울에 집을 얻었고, 이듬해 이관술이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근무를 시작하자 세 사람은 함께 지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남이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순금의 학업을 비롯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지원했던 어머니의 존재는 이순금에게 매우 중요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에 이순금은 동덕여고보 3학년에 편입을 했고, 이효정, 박진홍을 비롯하여 인생의 중요한 친구들이자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1932년 3월 이순금은 동덕여고보를 졸업했다. 그리고 2달 후인 5월 RS(Reading Society)협의회라는 독서회를 조직해 경성부 내 각 여자학교에 적화사상을 전했으며 불온격문을 배부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독서회는 학생들을 조직화했을 뿐만 아니라 학교 간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학교 밖에서 활동하는 성인 독립운동가와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순금이 경성 내 여자학교의 구성원들을 조직화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지만, 앞으로 수차례 반복되게 될 체포와 투옥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1932년 말부터는 이관술과 함께 반제동맹 경성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일제시기 노동자들은 식민지 지배 하에서 열악한 노동환경과 임금에서의 민족차별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것이 반제동맹이었다. 반제동맹은 공장과 학교에서 반제국주의운동과 적색노조운동을 전개했는데, 이순금은 ‘오르그연구회’라는 이름의 독서회를 조직해 활동을 했다. 이관술과 함께 체포됐지만 이순금의 경우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 시기까지 이순금은 조직의 기초를 닦는 일을 주로 했는데, 이재유를 만나 경성 트로이카에 참여하면서 지식인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이 있는 현장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1933년 3월 이순금은 이재유와 함께 경성 트로이카에 가담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노동자와 농민이 기반이 되는 새로운 전위당을 만들고자 했고, 이순금은 여성 직공들이 많았던 고무공장과 섬유공장으로 갔다.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을 만나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을 이끌었다. 1935년 재판 당시 이순금의 진술서를 보면, 이순금이 여성 노동자와 접촉한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글자를 가르치면서 사회주의와 노조 결성을 함께 가르쳤던 것으로 보이는데, 우선 한 사람을 접촉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모으는 방식을 통해 빠른 속도로 동지들을 규합했던 것이다. 이순금은 1933년 4월 별표고무 파업, 8월 소화제사 파업, 9월 조선견직과 서울고무 파업, 9월 경성제사 파업 등 여러 파업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은 1935년 경찰에 체포되면서 중단되었다.

1937년 7월에 출소된 이후 박진홍이나 이관술을 만나 활동을 재개하고자 했고, 영등포의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면서 다시금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같은 해 12월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다가 1938년 6월에 석방되었다. 이후에도 이관술, 박헌영, 김삼룡 등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경찰의 끈질긴 추격을 받으면서도 결코 독립운동을 중단하지 않았고, 그렇게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공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는데, 1945년 6월 9일에 열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제1회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전국인민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여성으로서 전국인민위원이 된 것은 이순금이 유일했다. 같은 해 12월 23일 전국부녀총동맹이 결성될 때 이순금은 중앙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직부장을 맡았다. 여성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들 역시 해방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서라도 여성들이 새로운 국가 건설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월북’과 함께 이순금의 활동 기록을 더 이상 확인할 수 없게 되었고, 이순금이라는 이름은 한국사에서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다.

일제는 이순금을 하우스키퍼(housekeeper), 애욕화(愛慾花)라는 말로 칭하며, 그 역할을 남성 독립운동가들의 보조적인 후원자 역할로 축소해서 해석했다. 가부장적 질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던 현실 속에서 여성 독립 운동가들의 역할은 확실히 제한된 면이 있었다. 이순금은 오빠인 이관술을 비롯하여 남성독립운동가를 후방에서 지원한 것에 대해 ‘뒤치다꺼리’라고 표현하면서도, 그것이 ‘민족해방운동의 한 사업’이었음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 여성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역할에 적극적으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런 이순금에 대해 어떤 이는 조선의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조선의 로자 룩셈부르크라고 평가했다. 일제는 이순금을 형무소에 가둘 때 마다 사진을 찍고 수형자 카드를 만들었다. 사진 속의 이순금의 눈빛은 점점 더 대범해지고 그 얼굴은 매번 더 단단해졌다. 나는 이순금의 독립운동이 재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순금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부르려고 한다. 정계향(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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