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때 괴뢰군에 쫓겨 낙동강까지 밀려갔다 서울이 수복됐다. 1954년부터 중·고등학생은 물론 초등학생에게도 반공교육이 체계화되고 강화되었다. 시골에서는 마을 단위로 ‘멸공통학단’이 조직되기도 했다. 반공 교육을 ‘도의(道義) 교육’에 넣어 초중고교에서 연 35시간 이상 가르치는 것이 의무화 되었다. 
도의 교육만이 아니라 미술교육도 반공정신에 투철해야 했다. 6·25 날이 오면 ‘무찌르자 공산군’ 그림을 신나게 그렸다. 용감하게 생기고 수류탄을 멋지게 던지는 철모를 쓴 국군들 옆에는 탱크도 그렸다. 그 반대편에는 전투모를 쓴 인민군들의 전투모 사이엔 뿔도 불거져 나왔고 온몸에는 검은 털이 숭숭 나 있었으며 손톱은 붉게 칠해졌다. 반공 교육에는 학교와 사회의 구분이 없었다. 굳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아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우선 ‘붉음’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붉은 꽃을 노래하지 못한다/ 붉은 낙조를 그리지 못한다/ 결코 나의 피는 붉지 않다/ 붉은 구호물자 치마는/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어라” (고은 시인의『만인보 18』)
최근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군가 인기투표를 했다. 1위가 “높은 산 깊은 골~”로 시작하는 ‘전선을 간다’였다. 2위가 ‘멸공의 횃불’이다. 70년대 중반 보급된 노래로 후렴구가 “멸공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로 끝난다.
그 ‘멸공’이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괴뢰군’이라는 표현처럼. 북한체제가 굳어지고 간혹 남북 화해 분위기가 감돌면서부터였다. 지난 10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쏘아 올린 ‘멸공’ 논란으로 수십년 만에 재소환 됐다. 조국 전 법무가 “거의 윤석열 수준”이라며 헐뜯고 나서면서 사태는 대선판으로까지 번졌다.
때맞춰 북한은 연일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것도 마하 10에 육박하는 극초음속 탄도 미사일이었다. 이 시각 멸공의 투쟁 대상은 공산당이 아니다. 위선과 거짓, 편가르기와 선동, 시기와 질투, 내로남불, 중국과 북한 앞에서의 비굴, 그 모든 것을 망라한 ‘비정상’을 극복하는 것이 ‘진짜 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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