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름 더 클래식 이음 대표 본지 독자권익위

코로나 팬데믹 공연 줄취소 시절 지나
거리두기 사라진 대면 음악회 반가워
마스크 벗고 편히 관람할 날 오길 기대

프랑스 여류작가인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1935-2004)을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만의 매력이 20대였던 나에게 굉장히 멋지게 느껴졌다. 그녀의 어떤 자유로움이 지나친 일탈로 변해서 사회적 지탄을 받을 때도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변호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제그때보다 나이가 든 나에게 그녀가 어떻냐고 물어본다면 여전히 멋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가 된 나에게 다시 한번 물어본다면 대답은 달라질 수도 있겠다. 어찌됐건 이젠 마스크를 벗을 시간이 오고 사람들의 미소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온 걸까? 예전에 읽었던 사강의 책 제목이 떠올랐다. <어떤 미소>
이제는 정말 마스크 뒷면의 당신의 미소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며칠 전 새로 오픈한 아트홀에서 개관 기념음악회를 열었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이 가까이 앉아서 즐기는 살롱 음악회였다. 물론 아직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들뜬 분위기에 함께 호응하는 무대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공연장을 가득 채운 들뜬 분위기, 무대와 객석이 구분돼 있지 않는 곳에서 느낄 수 있는 그 가까움 만큼이나 마음도 가까워져 오랜만에 한껏 취했다.
연주자들은 관객이 뿜어내는 기운과 공연장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가 처음 시작됐을 때 공연 자체를 할 수 없었다. 모든 공연이 스탠바이 돼있고 총 리허설까지 마치고 공연 시작 몇 시간 전에 돌연 취소되는 공연들이 속출했다. 공연이 미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기한 연기 다시 말해 그냥 취소되는 것이다. 연주가들, 스태프들, 모두가 공들였던 그 시간들이 갑자기 그냥 끝나 버리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상황이 조금 나아져서 무관객으로 촬영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것도 그나마 운이 좋을 때 이야기였다. 갑자기 공연장이 셧다운 되기라도 한다면 언제 열릴지 모르는 공연장을 그냥 기다렸다. 공연들이 줄줄이 취소되는 것을 보면서 설마 내 날짜에는 아니겠지라는 불안한 마음으로 연습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이상 공연장의 셧다운은 없어지고 객석 띄어앉기라는 것이 생겼다. 무대에서 이제 관객들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도 잠깐이었다. 띄어앉기로 텅 빈 객석을 무대에서 마주 보고 있노라면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스크를 쓰고 호응할 수 없는 관객과 무대에 서 있는 연주자들 사이에는 누구에게도 보이진 않지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정말로 두꺼운 벽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 팬데믹 종료가 선언되고 공연장의 거리 두기는 사라졌다.
아직은 모두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천천히 조금씩 모두의 미소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통째로 사라졌던 세상을 다시 찾아가는 느낌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작품 오페레타 <박쥐>에 나오는 노래 중에 ‘웃음 아리아’라고 불리는 소프라노의 노래가 있다. 무도회에 올 수 없는 하녀가 주인을 속이고 무도회에 오게 되는데 무도회에서 주인님과 마주친 하녀는 그녀를 알아보는 남작 주인에게 오히려 이렇게 아름다운 하녀를 본 적 있냐며 주인을 되려 속이며 비꼬는 노래인데 이때 노래 중간중간 하하하 웃는 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워낙 재밌는 설정에서 위트 있게 상황을 모면한 하녀의 노래라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도 소프라노의 노래와 웃음만 듣고 있어도 절로 따라 웃게 되는 유쾌한 노래이다. 실외에서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모두가 더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상황 속에서 견뎌내다 보니 더 이상 마스크가 처음처럼 불편하지도 않을 테고 그리고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람들의 북적거림과 마음껏 거리에서 신나게 크게 웃을 수 있었던 그날이 그립다. 어려운 자리에서 어른들과 함께 거리를 걸어가다 한 분이 갑자기 툭 던진 한마디 “여기 빵집에 빵이 되게 맛있어요.” 그 말이 어떻게 그렇게 다정하게 나에게 들렸던 걸까. 
어쩌면 아빠가 돌아가실 적 비슷한 연배의 모습의 어른이 비슷한 말투로 갑자기 나에게 툭 던지는 그 말에 아빠가 생각나서였을 수도 있고.. 나에게 말을 걸어 준 그분이 너무 고맙기도 했고. 그때 나에게 그 말은 정말 큰 의지가 됐다. 손으로 엄마 치맛자락을 꼭 붙잡고 있는 우리 꼬맹이들처럼 나도 그 말을 꼭 붙잡았으니 말이다. 상대방이 기억도 못 하는 희미한 미소에도 작은 다정함에도 가끔은 큰 위로를 받는다. 오늘 만나는 누군가에게는 내가 받았던 그 희미하고 다정했던 미소를 돌려줄 수 있는 그런 따뜻한 날이 되기를….

서아름 더 클래식 이음 대표 본지 독자권익위원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