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글래디에이터 포스터.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피해자 분한 여당 전대표의 요란한 행동
첫 단추가 어긋난 만남부터 소란의 연속
신뢰잃은 정치, 막장드라마는 민심 외면

 

 이준석이 검투사 막시무스를 소환했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충복이자 북부군 사령관 막시무스가 환생해 나타났다. 콜로세움 원형의 전설에 운집한 로마 군중 앞에서 전쟁영웅 막시무스를 무릎 꿇게 할 잔꾀로 옆구리에 단검을 찌른 비열한 황제 코모두스는 윤석열이라는 주석도 달았다. 이 정도면 막장이다. 
 막시무스, 20년 전 유럽의 전쟁영화에 익숙지 않았던 우리 세대에게 글래디에이터의 스치는 보리밭과 장엄한 말밥굽, 작열하는 북아프리카의 태양은 낯설었지만 찬란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영화는 허구의 스펙트럼을 관객들에게 펼칠 뿐,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이 코모두스인 것은 맞다.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권력욕에 불타는 아들 코모두스 대신 딸 루실라의 남편 폼페이아누스 장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아비의 속내를 눈치채고 패륜을 저지른 것으로 나오는 영화는 설정이다. 황제는 아들의 손이 아니라 원정길에서 콜레라로 추정되는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감독은 공화정이 무너지는 어설픈 역사의 한 자락에 막시무스를 끼워 넣었다. 허구다. 이준석은 허구에 자신을 분칠해 피해자로 눈물을 흘린다. 가관이다.
 영화는 허구였지만 딱 하나,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끝 장면에 터지듯 뱉어내는 막시무스의 한마디는 20년 전 가을, 사내의 심장을 뛰게 한 기억의 한 자락을 되살아 나게 한다. 
 <내 이름은 막시무스. 북부군 총사령관이자 릭의 장군이었으며 마르쿠스 황제의 충복이었다. 태워 죽인 아들의 아버지이자 능욕당한 아내의 남편이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살아서 안 되면 죽어서라도> 
 거침없는 한마디 속에는 당당함과 위엄이 배여 있다. 그 위엄이 양어깨에서 돋아나 휘장처럼 빛났다. 이왕에 허구의 인물에 자신을 빙의하고 싶었다면 이준석은 이 장면쯤에 자신을 끼워 넣어야 했다. 머리와 입이 빠른 이준석이 이 장면을 놓칠 리 없지만 아무리 궁리해도 여기 어디쯤에는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2년쯤 전이었다. 대구의 한 신문사 유튜브 채널에 이준석이 등장했다. 그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안철수가 서울시장이 되고,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되면 지구를 뜨겠다"그 말에 이어 더 빨개진 입술로 이준석은 삐쭉거렸다. "유승민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  이준석의 이 발언이 진심이었다는 사실은 앞선 행적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2019년 12월 '여성신문TV'에서 사회자가 '21대 국회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21대 국회에서 내가 있는 당(바른미래당)이 압승해 나중에 유승민 대통령 만들고"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이 정도면 유승민 대통령 만들기의 행동대장으로 손색이 없다. 이준석의 뒷배가 유승민이고 그의 정치 입문 역시 유승민의 정치적 유전인자를 밑천으로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라면 머리를 끄덕일 대목이다. 
 첫 단추가 어긋난 윤석열 대통령과 이준석의 만남은 이런 과거를 깔고 시작됐다. 당연히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 힘 입당 시점부터 사사건건 이준석과 부딛혔다. 위태로운 상황을 즐기듯 이준석은 꾀주머니 운운하며 정치 초보 윤석열 대통령을 손바닥에 올려놓는 듯했지만, 결별은 이미 예정된 수순일 뿐이었다. 대선 캠프가 꾸려지자 갈등은 노골화됐다. 선거대책위원회 운영을 놓고 정면 충돌했던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이준석 당 대표는 사퇴와 화해를 반복하며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이어갔다.
 갈등이 극에 달하자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해 "모든 게 다 제 탓"이라며 "대의를 위해 지나간 걸 다 털고, 오해했는지도 아닌지도 다 잊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준석 대표를 여러분이, 국민이 뽑았다. 저와 대표와 여러분 모두 힘을 합쳐서 3월 대선을 승리로 이끌자"라고 호소했다. 
 당시 당내 여론은 대표탄핵이 대세였다. 이준석은 대표직에서 쫓겨날 상황이었지만 윤 후보와 극적으로 화해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출당 위기에서 벗어났다. 지난해 겨울 울산회동은 지금의 '윤핵관' 논란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결정적 장면 중의 하나다. 잠적 소란으로 선거판을 흔든 이준석과 이준석 찾아 삼만리를 달린 울산 정치인들의 폭탄주 화해는 두고두고 회자할 일이었다. 이준석은 한 때 자신의 정적이었던 안철수를 두고 '병신'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조롱했다. 부인하던 이준석은 녹취록이 공개되자 "사석에서 한 말이며 이것이 문제가 될 발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비켜 갔다. 바른미래당 윤리위원회는 이를 문제로 삼지 않았지만 안철수 측에서 문제를 삼자 뒤늦게 징계절차를 밟아 이준석의 최고위원직과 노원병 당협위원장직을 박탈했다. 
 무명가수전과 유명가수전, 뉴페스타로 이어가던 JTBC의 노래 경연 콘텐츠의 인기는 한 때 대단했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종착역은 참담했다. 뉴페스타 최종회는 0% 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방영 전만 해도 '뉴페스타'의 기대는 컸다. 새로운 방식의 페스티벌 음악 경연프로그램에 이목이 쏠렸지만 핵심 진행자의 표절논란과 어정쩡한 마무리로 신뢰를 잃었다. 그 끝은 시청자들의 외면이었다.
 법원 판결을 앞두고 이준석은 방송에 나와 자신의 처지를 막시무스로 비약했다. 이준석은 "결국 검투사가 대중의 인기를 받게 되고, 그 인기를 잠재우기 위해 황제 본인이 직접 검투사와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서 "그런데 황제가 자신감이 없으니까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옆구리를 칼로 푹 찌르고 시작한다"고 답했다. 허구의 인물을 현실에 빗대다 보니 비약이 따른다. 신군부의 절대자로 윤석열 대통령을 비유한 탄원서는 결정적 한 방이다. 이제 더 이상 악수할 일은 없다는 의사표시다. 어설픈 정치입문생이 아마추어 같은 정적 제거로 구설에 오르고 새로 찬 완장에 신이 난 몇몇 핵관들이 깨춤을 춘 집권 100일의 슬픈 자화상이다. 오직 앞만 바라본다면 강을 건너온 배는 확실하게 불태우는 게 답이다. 잔불이 남으면 또 구설이 따른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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