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이 출토된 울산 울주군 삼남읍 신화리 일원의 경부고속철도 울산역사 옆의 야외 전시실.  이수화 기자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이 출토된 울산 울주군 삼남읍 신화리 일원의 경부고속철도 울산역사 옆의 야외 전시실.  이수화 기자

 

 

김진영 이사·편집국장

    꽃샘추위가 몇 번을 오갔지만 벚꽃은 피어났다. 지금은 궁거랑에서 봄날 향연이 이어지지만 울산에서 벚꽃의 첫째는 역시 작천정이다. 불편한 이웃 때문에 화들짝 피어났다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조차 시류에 흩날리지만 사쿠라든 벚꽃이든 봄빛 물들이는 데는 이만한 전령이 없다. 우리 땅의 벚꽃은 왜의 벚나무와 유전적 동질성이 없는 별개의 품종으로 제주가 원산지다. 프랑스인 신부 타케가 제주도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한 것은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8년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62년 국립과학관에서 "벚꽃은 우리 꽃이고 한라산이 원산지"라는 주장을 확실히 했다. 실제로 오랜 연구 결과 일본에서 건너온 개량종 벚나무가 아닌 우리 땅에서 자란 본래의 왕벚나무는 제주가 원산지로 확인됐다. 

 나무에 국적을 따지는 일로 글이 시작된 것은 작천정 벚나무 때문이다. 1㎞에 달하는 작천정 벚꽃 터널은 역사가 벌써 한세기 가까이 된다. 오늘 울산여지도가 걸어보는 명품 울주의 뿌리 길이다. 봄의 전령 벚꽃이 만개할 때쯤 이 길을 걷게 된다면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지금부터 85년 전인 1937년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삼남사람 곽해진이다. 이분이 작괘천 도로를 개통하고 벚나무를 심어 일경의 환심을 샀다. 신화리 마산마을이 고향인 곽해진(郭海鎭·1888~1939)은 천도교도들과 언양 만세를 주도했고 항일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만세운동 당시 아들 대신 앞장선 모친 길천댁이 왜경 총에 허벅지 관통상을 입어 얼마 후 사망했다. 중남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일보 언양지국장도 지냈다. 일경이 호시탐탐 감시의 눈길을 이어가자 작괘천으로 통하는 길을 열고 벚나무를 심어 관심을 돌린 것이 지금의 명품 벚꽃 길의 유래다. 

 바로 그 명품 벚나무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땅이 삼남이다. 울주 12개읍면 가운데 비교적 최근에 읍으로 승격한 삼남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조 때 대부분의 큰 길은 한양과 통했다. 지방에서 한양과 통하는 9개의 큰 도로 가운데 울산과 가장 가까운 길은 제4로였다. 한양-용인-충주-새재-대구-동래-부산까지의 좌로(左路)다. 이 당시 울산의 도로는 모두 소로이며 9개의 대로에는 비켜 있었다. 대로에 직접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대로에서 갈라져 뻗은 지선도로였다. 제4로의 중간 지점인 유곡역(문경) 다음의 덕통참에서 갈라져 광대천-심천참-안계-비안-군위-신녕-영천-건천-경주-좌병영(중구 병영동)-울산으로 이어지는 지선도로에 놓여 있었다. 언양은 영천에서 다시 갈라지는 또 다른 지선도로상에 있었다. 그 길의 핵심에 삼남이 있었다. 울산읍성에서 굴화를 지나 언양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언양읍성에서 동서로 뻗어  밀양으로 이어지는 도로망, 그리고 언양읍성에서 남쪽의 양산과 북쪽의 경주에 닿는 도로가 울산 서부권 도로망의 핵심이었다. 

 조선조의 도로망을 살피면 오늘의 국도 24호나 국도 35호선과 별반 다름이 없다. 삼남에 10여년 전 KTX 울산역이 들어서고 철도교통의 심장으로 변모한 연유도 따지고 보면 조선조 이전의 지리적 중요성이 이어진 탓이다. 말이 난 김에 KTX 울산역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경부고속철도의 동쪽 지선이 그어지면서 울산쪽 철도 위에 문화재 지표조사가 시작됐다. 사건은 울산역사가 들어설 삼남읍 신화리 일대에서 벌어졌다. 5개 기관에서 발굴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엄청난 유적이 드러났다. 그동안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드물게 나타난 구석기 유적이었다. 구석기부터 시작한 유적은 청동기시대, 삼한시대, 삼국~통일신라시대, 고려~조선시대 유적과 유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 지역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이 확인된 사례는 한반도 유적 조사에서 드문 경우였다.

 문제는 내용이었다. 발견된 유적과 유물은 울산 역사를 새로 쓰게 했다. 울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3만년, 혹은 훨씬 이전으로 올라가게 됐다. 이 유적 발굴 이전까지는 울산의 시작을 신석기시대로 보았으나, 신화리 유적 조사로 몇 만 년 더 올라가게 된 셈이다. 울산에서 일어난 우리 고대사의 기적 가운데 여섯 번째 기적이었다. 첫째는 천전리각석의 발견이고 두 번째는 반구대암각화의 발견, 세 번째 기적은 옛사포 일대 항만유적 발견이고 네 번째가 중산과 검단의 청동기 집단주거시설 발견, 다섯 번째가 신암리 비너스상의 발견이었다. 고대사의 기적은 더 많이 이어질 것이지만 기적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과 무관심한 이들은 발견의 요란함을 애써 무시하며 해가 지면 드러난 유적을 흙으로 덮기에 바빴다.

   바로 그 신화리는 오래전부터 쌍수정리(雙水亭里)로 알려졌다. 선사인의 땅이 대부분 그렇듯 이곳도 신불산에서 흘러온 작괘천과 가천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두물머리다. 여러 고지도에 신화리 일대가 쌍수정리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쌍수는 오래된 이름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고속철도 역사 옆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 유적이지만 기차를 타기 전 잠시 둘러보면 울산의 옛 땅, 선사인과 만나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시기를 달리하는 3개의 구석기 문화층이 확인된 이 땅에는 놀랍게도 석기제작소가 있었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견된 석기제작 공장이 울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땅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어디 그 뿐이가. 울산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세형동검부터 온돌주거지와 대형 건물지는 신비로움을 더한다. 건물 끝이 둥근 모양으로 연결되어 열쇠구멍처럼 생겼는데, 도대체 무엇을 하던 건물인지 여전히 미스터리다. 세형동검과 함께 발견된 인골 중 치아를 분석해 보니 20대 건장한 사내로 밝혀졌다. 아마도 이 사내는 오래전, 이 땅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부족의 수장으로 영남알프스 아홉 봉우리를 호령했으리라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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