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치지 않으면 패하고 속이지 않으면 망하고 다투지 않으면 잃고 거짓을 꾸미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 이것이 혁(奕·바둑)의 필연이다.” 당(唐)나라 말 유학자 피일휴가 ‘바둑론’에서 한 말이다.
바둑은 팔괘와 닮았다. 흑백 180개의 돌은 1년의 낮과 밤, 즉 음양을 본받았다. 이처럼 바둑과 역서(易筮)는 동일한 세계관을 지니고 태어난쌍둥이로 보이는데 기능은 전혀 달라졌다. 역(易)은 하늘의 뜻을 알아내는 기법으로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는데, 바둑은 승부의 놀이요 기술이 되었다.
바둑을 오래 수련하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권준수 교수팀(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이 지난해 바둑 전문가와 일반인의 뇌기능을 비교해본 결과 바둑 전문가들이 집중력과 기억력, 문제 해결능력, 수행 조절능력 등을 담당하는 뇌의 오른쪽 전두엽 부위 등이 일반인들 보다 훨씬 발달했다고 밝혔다.
‘웃지 않는 돌부처(不笑石佛)’. 중국언론이 붙여준 ‘국민기사’ 이창호 9단의 별명이다. 그는 ‘미륵불’, 한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해서 ‘강태공’, 두텁고 꾸준하게 밀고 나간다해서 ‘탱크’, 꿍심이 보통 깊지 않다고 해서 ‘능구렁이’로 불려왔다. 모든 별명들을 통해 떠오르는 것은 ‘두텁다’ ‘한결같다’ ‘기다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 2월 무관(無冠)의 제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89년 14세때 첫 타이틀을 따낸 이후 21년만에 처음이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자의 무력한 모습에 바둑 팬들은 안타까워 했다. 지난해 10월 결혼과 함께 부진을 털고 일어설 것이라는 주위의 예상도 빗나갔다. 요즘엔 계산이 잘 안돼 역전패를 당하곤 한다. 36세, 불혹의 나이를 앞두고 직업병이라할 두통과 얼굴이 붉어지는 ‘상기증’ 때문에 ‘쉬고싶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힐 때도 많다고 한다. 최근 펴낸 자서전 <부득탐승(不得貪勝) 아직 끝나지 않은 승부>에서는 새출발을 다짐했다.
‘부득탐승’은 중국 송나라 때 고수 유증보가 지은 ‘위기십계’ 즉 바둑 10계명 중 첫번째, ‘승리를 탐하면 얻지 못한다’는 뜻으로 승부의 기본자세를 담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기려면 버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잘나가다가 세월 앞에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