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강왕 “용 위한 절 지어라”… 구름·안개 걷힌 포구 ‘개운포’
용왕 일곱 아들 중 왕에게 보낸 ‘처용’이 나타난 곳이 처용암
망해사터엔 파손된 승탑 2기만 남아… 주인없는 부도도
처용설화·처용가·처용무 등 소중한 유산 제대로 지켜나가야

울주군 청량면 율리 문수산 자락에 위치한 망해사는 신라 헌강왕이 동해 용왕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은 사찰로 ‘처용 설화’에 등장하는 사찰이다. 옛 절집은 모두 사라지고 부도 형식의 승탑 2기만 남아 옛 흔적을 전한다. 맑은 날엔 오른쪽 골짜기 사이로 멀리 바다가 보인다고 한다.

며칠째 계속된 맹추위가 주춤하던 날, 남구 부곡동과 황성동을 잇는 고갯길을 넘어 처용암을 찾았다. ‘곧 바다가 나오겠지’ 생각하며 잠시 딴 생각을 하다 낯선 길과 맞닥뜨렸다.

분명 세죽마을, 선수마을이라 불렸던 곳인데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갈래의 새 길이 생기면서 마을 모양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옛 기억을 더듬어 겨우 처용암이 보이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겨울 처용암은 황량했다. 인적은 고사하고 그 흔한 겨울새조차 몇 마리 보이지 않는다. 주위는 온통 공장 뿐이다. 카메라 화면에 공장이 나오지 않도록 요리조리 돌려보았지만 부질없었다.

신울산산업단지와 울산신항이 들어서면서 주위는 이미 공장들로 가득 찼다.  바닷가 공원에 덩그러니 서 있는 ‘처용가’ 시비의 모습이 오히려 생경하게 다가온다.

처용가 시비와 처용암.

◆헌강왕과 처용의 전설이 깃든 곳

처용암은 문수산 등에서 발원한 물길이 울산만으로 들어가는 외황강의 끝에 있는 186평 규모의 바위섬이다. 처용암은 처용랑과 개운포의 설화가 시작되는 곳이다.

울산시에서 열리는 가장 큰 축제인 ‘처용문화제’를 여는 제의가 해마다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처용설화의 발원지의 가치 때문에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처용암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에 실려 있다.
신라 헌강왕 때의 일이다. 헌강왕이 다스리던 시기는 통일 신라가 마지막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던 때라 할 수 있다.

‘경주서 인근 바다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맞닿아 있었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생황소리와 노래 소리도 도로서 끊이지 않았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 시기 신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어느 날 헌강왕이 울산에 왔다가 개운포 해변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운무가 가려 앞을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헌강왕과 그 일행은 길마저 잃고 말았다. 갑작스런 이상기후 현상에 동행한 신하가 “동해용의 조화입니다. 용을 위한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고 했다. 왕은 주저 없이 “그렇다면 용을 위한 절을 지어라!”고 명령했다.

왕의 이 한마디에 하늘은 원래의 맑고 푸른 제 모습을 드러냈다. 훗날, 사람들은 ‘구름과 안개가 걷힌 포구’라 해서 이곳을 개운포(開雲浦)라 했다. 

이야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안녕을 위한 절이 세워진다는 말에 크게 기뻐한 용왕은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헌강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는 춤을 추었다.

망해사 터에 남겨진 무너진 불탑의 잔해들.

그도 모자라 일곱 아들 중 한 명을 왕에게 보내 정사를 돕게 했다. 그가 바로 ‘처용’이다. 이 때 처용은 바위 밑에서 나왔는데, 이를 처용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왕은 그를 미녀와 짝지어주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처용의 아내를 역신(疫神)이 사랑하여 범하려 했다. 이를 목격한 처용이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었다.

‘서울(경주)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들어와 잠자리를 보니/가랑이가 넷이도다./둘은 나의 것이었고/둘은 누구의 것인가?/본디 내 것이지마는/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처용의 노래와 춤에 역신이 나타나 무릎을 꿇고 빌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백성들은 처용의 형상을 그려 문간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는 방편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처용설화와 함께 전해오는 ‘처용가’와 이를 바탕으로 궁중음악으로 발전된 ‘처용무’는 울산의 소중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공단 속, 사람들이 찾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처용암을 보면서 처용의 가치를 찾고, 후세에 전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망해사 터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부도도 1기 남아있다.

◆동해 바다가 보이는 곳에 세워진 사찰

발길을 돌려 문수산 망해사(望海寺) 터로 향했다. 망해사는 개운포에서 헌강왕이 용을 위해 지으라고 했던 절이다. 지금의 망해사는 헌강왕 때의 그 절집이 아니다. 옛 절집은 사라지고 최근에 지은 절집이 망해사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망해사가 위치한 곳은 영축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영축이란 산 이름도 사라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망해사에는 망해대(望海臺)가 있어서 멀리 바다가 보이고, 선비들이 자주 찾아와 시를 읊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절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망해사와 망해대 터는 이 절보다 훨씬 위쪽일 가능성이 크다.

망해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솔길을 따라 망해사 터에 올랐다. 겨울 산새들과 절집 옆 유치원에서 나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린다. 그런데 소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최근 개통된 고속도로와 산업도로에서 나는 차량 소음이 여간이 아니다. 호젓한 산사와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다. 

오솔길을 50여 미터 올랐을까? 망해사의 흔적으로 남은 석조 부도가 하얀 얼굴을 내민다. 부도라고 하긴 너무 규모가 크다. 그래서 최근엔 많은 학자들이 승탑이라고 부른다.

두 승탑은 현재 보물 제173호로 지정돼 있다. 서편에 놓여있는 승탑은 비교적 옛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동편에 놓여있는 승탑은 파손이 심해 기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승탑의 주인은 아마도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동탑과 서탑의 두 탑이 거의 같은 크기, 조각수법, 양식을 지니고 있는 쌍둥이 탑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래서 동시대의 같은 석공이 같은 기법으로 쌓아올린 듯한 느낌을 준다 

승탑의 위치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양식인 ‘이탑일금당’ 이다. 금당을 뒤에 두고 전면에 탑 두 개를 올리는 경향이 망해사지 승탑의 건립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승탑 주변에는 파손된 석탑의 부재들을 모아 놓은 곳이 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작은 부도도 한 켠에 자리 잡았다. 

공장에 둘러싸인 처용암. 신라 헌강왕과 처용의 설화가 탄생한 곳이다.

◆‘처용’을 울산의 온전한 유산으로 만들어야

처용의 설화는 황당한 옛이야기로만 볼 수 없다. 개운포와 처용마을, 처용암, 망해사란 이름까지 옛 부터 존재하면서 사실감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처용은 울산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처용 설화에 등장하는 처용암과 망해사 터 모두 방치돼 있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

처용문화제는 전통보다는 ‘서역’의 음악 축제로 변질돼 버렸고, 처용 설화를 바탕으로 전해져 오는 ‘처용무’도 온전한 울산의 자산이 되지 못하고 있다.

처용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을 울산은 물론 해오름시대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으로 만들기 위한 ‘통 큰’ 계획과 투자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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