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듯 하면서도 바로 옆에 붙어있는 두 단어
삶은 끝과 시작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모두에게 박수를

 

김감우 시인

출근길에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한 남자를 봤다. 첫아이 졸업식에 가는 길일까. 손에 든 노란 튤립처럼 그는 신선하고 들뜬 표정이었다. 차창 밖으로 막 스쳐지나간 그 꽃을 향해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있었다. 가슴 한쪽이 뭉클해졌다.

졸업과 입학의 철이다. 배움의 한 과정을 마무리하고 새 공간을 노크하는 때이니만큼 설렘과 감동 등의 긍정을 담은 말들이 바쁘게 드나들 것이다. 물론 한 과정의 끝자락에 서고 보면 후회되고 아쉬운 일인들 왜 없겠는가. 앞으로 열릴 새로운 장은 또 얼마나 두렵고 긴장되겠는가. 영화 ‘원더’에서 주인공 어기와 아빠가 교문 앞에서 헤어지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더 이상은 아빠와 함께 할 수 없고 더 이상은 헬멧 속에 자신의 흉한 얼굴을 숨길 수도 없는 끝과 시작의 긴장된 순간을. 

입학에서 졸업까지의 긴 여정을 일단락 짓는 청소년에게, 삶이라는 무대에서 장면 변화의 캄캄한 터널을 잠시 지나갈 그들에게 박수와 함께 릴케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그 말고는 삶이 당신에게 벌어지는 대로 놔두십시오. 내 말을 믿으십시오. 삶은 어떤 경우에든 옳습니다.” 이 문장은 책「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있다. 릴케가 카프스라는 문학 지망생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뤄진 책인데 그중 아홉 번째 편지에 있는 구절이다. 언젠가 몹시 아픈 나에게 와서 한없이 내 등을 다독였던 구절이었다. 

끝과 시작, 두 말은 멀리 있는 듯해도 실은 바로 옆에 붙어있다고 하겠다. 어떤 일의 끝은 다른 세계의 시작과 같기 때문이다. 섣달그믐의 칠흑 같은 밤 바로 다음에 오는 정월 초하루의 새벽처럼. 혹한의 끝에서 꽃망울 터트리는 매화처럼. 마침표 바로 다음에 찾아오는 새로운 시의 첫 행처럼. ‘끝과 시작’은 쉼보르스카의 시 제목이며 그의 시 170편이 실린 시선집 제목이다. 시작과 끝이라는 순차적인 시간관념을 버리고 끝남이 열어주는 새로운 세계에 초점을 둔다. 이 시에서 시인의 시선은 전쟁 뒤에 오는 황폐함 속에서도 제 역할을 다하는 삶에 머문다.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시 ‘끝과 시작’ 1연)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폴란드의 시인으로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나도 그녀의 시를 좋아한다.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가려움이 심해지거나 내면에 혼탁한 파도가 가득 일렁일 때면 나는 그녀의 시를 찾는다. 시세계에 펼쳐진 그녀만의 광활한 숲에 들어가 끝없는 질문의 촉을 따라가다 보면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소재들에 눈을 맞추는 일은 새롭고 즐겁다. 구름이나 사슬, 거대한 숫자 등의 시를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가운데 새로운 영감이 솟아난다는 노벨문학상 수상소감문에 밑줄을 긋기도 한다. 기존의 편견을 다 벗어던지고 사물이나 현상을 새롭게 보는 그녀의 시에서 나는 추상같은 꾸지람 한바가지를 듣기도 한다. 

쉼보르스카는 89세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았고 마지막 시집이자 유고시집이 된 책「충분하다」는 생전에 시인이 제목을 먼저 정해두었다고 한다. 책의 해설처럼 ‘충분하다’라는 이 미완의 문장은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마지막 한마디였을지도 모른다. 충분하다! 평생 시의 외길을 걸어온 시인이 주고 간 넉넉하고 따뜻한 메시지에 달려가 안기고 싶은 계절이다. 

나는 7년째 활동하고 있는 동인이 있다. 매월 창작시를 교류하고 미리 정한 책 한권을 다루는데 이번에는 끝과 시작을 만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즐거운 독서를 하고 있다. 문우들이 전율하는 문장을 무엇이었을까? 뭐니 해도 다음 시를 빼놓지는 않을 것이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없이 죽는다’(시 ‘두번은 없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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