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의 여성독립운동> 표지  
 
   
 
  ▲ 1929년 3월1일 보성학교 학생들과 교원들  
 
   
 
  ▲ 1932년 지역별 학생현황  
 
   
 
  ▲ 각종 강연회가 개최된 울산청년회관의 전경(동아일보 1932. 11. 6)  
 
   
 
  ▲ 울산로동여자야학원 학예회 동극장면(동아일보1933. 10. 20)  
 

1.프롤로그

2.울산여성독립운동사를 시작하며

3.울산여성, 식민지를 살다

▶▶4.학교에 간 여성들

5.사회로 나온 여성들

4.울산의 여성독립운동가

(1)이순금(1912~?)

(2)이효정(1913~2010)

(3)손응교(1917~2016)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전개를 살펴보면, 전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여학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여학생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했고, 3·1 만세운동 이후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의 시위를 이끌며 중앙과 지방의 소통창구를 담당했다.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유관순 열사는 서울 이화학당에 소속된 학생이었고, 버선 솜에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고향인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던 조화벽은 개성 호수돈여학교의 학생이었다. 이외에도 부산 일신여학교, 대구 신명여학교, 평양 숭의여학교, 광주 수피아 여학교, 전주 기전 여학교의 학생들은 각각의 신념으로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신사참배를 거부했으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울산에서는 여학생들의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울산에는 여자들이 다닐만한 중등 수준의 교육기관도 제대로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지역의 여학교로 진학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학생들은 있었다. 부산 일신여학교의 학생으로 1919년 3월 11일 부산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송명진과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후 전개된 ‘서울학생궐기’에서 근화여학교 학생으로 동맹휴교와 시위에 참여했던 이갑술이 바로 그들이다. 이외에 동덕여자보통학교에서 반제동맹 책임자로 활동했던 이순금도 있었으나 해방 후 월북했다.

한국 여성의 근대식 학교 교육은 1885년 조선에 입국한 미국인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가 1886년 설립한 이화학당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여성 교육은 있었지만 주로 가정에서 이루어졌고 학교와 같은 독립된 공간에서 집단으로 실시되지는 못했다.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부터였다.

1920년대에는 약 100여 명의 한국 여성이 미국에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이들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근대적인 학문과 사회제도를 경험했고, 자연스럽게 조국의 교육, 여성의 권리, 농촌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귀국한 후에 여러 여성단체를 조직해 농촌계몽사업을 전개 했고 잡지나 신문 또는 강연을 통해 여성 교육에 대한 필요성도 꾸준히 주장해 나갔다.

지역에서의 여성 교육은 조선교육령에 근거한 것으로 큰 틀에서 방향은 같았으나 각 지역의 특색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에는 1895년 호주 선교사들이 설립한 일신여학교와 1927년 설립된 부산 도립 여자 보통학교, 1931년 설립된 각종학교인 공생 여학교가 있었지만, 울산에서는 이와 같은 기독교계 여성 교육기관과 공립학교는 설립되지 못했다.

2001년 출판된 울산 교육사에 의하면 1911년에 울산에서도 여자 중등 교육기관으로 김홍조(金弘祚)가 설립하였다고 알려진 울산 여자학교가 있었고 중등 수준의 교육을 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설사 개교되어 운영되었더라도 당시에 중등교육 기관은 교사 확보가 어려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초등교육을 받을 기회는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지역마다 새로운 학문을 배우려는 의욕이 강하게 일어나 보통학교를 설립하고자 출자금을 모았고, 그 결과 일제 중기에 해당하는 1920년부터 1937년 사이에 울산의 공립보통학교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학교의 증가와 함께 여자아이들의 취학도 늘어났다. 당시 울산의 취학률과 여학생 비율은 1933년 울산지역 학교에 근무하던 일본인 교장들이 집필한 『울산군향토지』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1932년 조사 당시 울산의 총인구는 144,140명으로 일본인이 3,401명, 외국인이 30명, 한국인이 140,709명이었다. 이중 한국인 학령 아동 수는 19,707명이었으나 취학 아동 수는 3,521명밖에 되지 않았다. 전체의 17.9%였다. 그러면 17.9%의 취학 아동 중에서 여학생 비율은 얼마나 되었을까. 1932년 5월 말 보통학교의 남녀 비율을 따져보면 울산, 하상, 농소, 강동, 동, 대현, 온산, 서생, 온양, 청량, 웅촌, 범서, 두동, 두서, 언양, 길천, 중남, 삼동 지역 18개 학교의 총 아동 수는 3,636명인데 남학생이 3,036명이고, 여학생이 600명으로 여학생 비율은 약 20%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후 여성 교육에 대한 사회적인 요구와 조선총독부의 취학 장려정책으로 그 비율은 점점 늘어나게 된다. 공립보통학교 외에도 서당, 농촌 벽지의 간이학교, 사설 강습소와 학원 등이 운영되었지만 많은 여성이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민간에서 운영했던 여자 야학을 통해 실질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문자나 산수 등을 배우고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기 신문으로 확인되는 여자 야학은 1923년 언양 청년회의 여자 야학, 1924년 울산 천도교 여자 야학, 1924년 일산 보성강습소 내 여자 야학, 1925년 울산병영청년회의 부인 야학, 1926년 유곡동 여자 야학, 1933 노동 여자 야학, 1935년 통도사 울산 포교당 여자 야학이 있다. 이곳에서 여성들은 기초 문자 교육 이외에도 다양한 주제로 강연을 들었으며 입학식과 졸업식 및 학예회, 운동회 등의 행사에 참여했다. 여자 야학이 성행한 사실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변화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1924년, 『신여성』이라는 잡지에는 조선의 여성 교육 현실을 한탄하는 내용이 나온다. 860여만 명의 조선인 여성 가운데 여학생은 5만 내외에 불과한 데 비해, 재조 일본인 여성은 15만 명 중 여학생이 3만 명 이상인 불균등한 현실을 지적하며 슬프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 지방의 여성 교육은 그중에서도 더 열악하였는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울산에는 제대로 된 여성 고등교육 기관도 없었고, 여자아이에게는 보통학교 입학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여성 교육에 대한 시대적 필요와 배움에 대한 개인의 욕구가 만나면서 수많은 배움의 공간이 생겨났다. 여자 야학과 강연회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여성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지식을 배웠고, 여러 사회운동에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여성들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황은혜(격동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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