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 검단리 청동기 유적  
 
   
 
  ▲ 동북아 최초의 수전경작지로 세상을 놀라게 한 울산 옥현유적지  
 
   
 
  ▲ 초라하게 남아 있는 중산동 청동기 시대 고분  
 
   
 
  ▲ 일본의 대표적 청동기 복원 유적인 요시노가리  
 

반구대암각화 발견 50년 특별기획







방치된 울산의 선사문화, 활용방안 제대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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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보고, 개발논리 밀려 흔적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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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 완전한 모습의 환호(環濠) 확인된 검단리 유적

초기 국가형성기 알려주는 취락구조 등 문화유산 훼손 가속

본격적인 복원 여론 새단장 추진, 고증과 활용 등 고민해야



울산 옥현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인 기원전 7세기 수전유적

사료적 가치 엄청나지만 덮어버린채 흔적도 없이 개발 강행

중산리 일대는 청동기와 철기 변화 보여주는 희귀한 유적지















2. 울산 검단리와 옥현유적지와 중산리의 현실





울산박물관에서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보고인 울주 검단리 유적을 소개하는 테마 전시를 열고 있다. 지난 1990년 부산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검단리 유적은 골프장 건설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유적이 특별한 것은 한반도 최초로 완전한 모습의 환호(環濠)가 확인된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이라는 점이다. 환호는 내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싼 큰 도랑을 말한다. 다시 말해 환호로 취락지를 형성한 당시 사회가 본격적인 농경 사회였음을 말해주는 증좌다. 규모도 상당하다. 검다리 유적 환호는 전체 길이 298m에 내부 면적은 5천974㎡다. 유적에서는 집자리 92동, 지석묘 3기 등 유물 796점이 확인됐다. 집자리와 토기들은 '검단리식 집자리', '검단리식 토기'라는 고유명칭으로 불리며 울산의 역사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울산의 경우 1990년대 이후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울산은 경주의 변방으로 공업단지라는 인식 때문에 달천철장의 철기문화나 반구대암각화의 선사문화 초기 유적들이 미미한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검담리와 중산리 신암리 유적 발굴을 통해 한반도 구석기 문화부터 철기문화에 이르는 중요한 문화유산을 가진 도시로 재평가 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의 논리에 밀려 울산의 선사유물과 유적은 훼손되거나 방치되는 상황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울산 울주 검단리 유적이다. 검단리 유적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조성된 청동기시대 환호(環濠)가 넓게 분포돼 있다. 이전까지 일본에서만 발견되던 환호 형태의 취락 유적이 검단리에서 발견되면서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환호란 선사시대 마을 경계를 구분하거나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외곽을 둘러싼 도랑을 말한다. 청동기시대 후기가 되면 잉여 생산물을 놓고 집단 간 갈등이 벌어지는데 환호는 이때 방어수단으로 만들어졌다. 고고학자들은 환호가 계급 발생이나 초기 국가 형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본다. 그만큼 중요한 유적이다. 하지만 이 유적은 국가가 보존하거나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다.

반면 일본학계의 관심은 뜨거웠다. 하루나리 히데지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 등 일본 학자들이 검단리 발굴 현장을 직접 찾아와 환호의 형태부터 주거지 개수까지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했다. 2년 뒤 검단리 발굴 성과는 주요 학술지인 일본 고고학 연구 에 다양한 컬러 사진과 함께 비중 있게 게재되기도 했다.

울산 북구 중산리 유적 역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끈 후기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유적이었다. 울산 중산동 유적지는 2~7세기에 이르는 삼국시대 신라 전기간에 걸친 고분이 약 800여 기나 존재하며 약 8,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 지역이다. 이로써 그 동안 신라고분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문제점으로 지적된 자료적 한계가 극복되었고 신라 고분의 변천과정을 기술함에 있어 표식적인 중요 자료가 확보됐다. 무엇보다 중산동 고분군에서는 둘레돌을 가진 대형봉토분이 출현하고 판갑옷 투구 다양한 형태의 창과 큰칼의 다량 매장이 이뤄졌는데 이는 중산리를 중심으로 강력한 무장세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중요하다. 아울러 청동기시대의 장방형 주거지가 발굴되는 것은 물론 야철유적 흔적 등이 확인되는 귀중한 고고학적 가치를 가진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청동기시대부터 신라시대에 이르는 귀중한 유적지인데도 이를 제대로 복원하고 활용하지 못한 채 아파트 건설 공업단지 개발 등으로 방치했다.

옥현유적은 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가진 유적이다. 옥현 유적은 한반도 최초의 청동기시대의 논 터가 대량으로 발굴된 곳이다. BC 7세기경에 시작된 한반도 논농사의 첫 흔적이 바로 울산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 공업도시 울산에 한반도 최초의 논농사 유적이 나왔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었다. 옥현 유적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적은 무려 72 동의 움집터와 논, 그리고 수전유적, 환구(環溝. 마을주위를 둘러판 도랑) 등이었다. 놀랍게도 이들 유적은 거의 원형 그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청동기 시대의 농경생활과 문화 및 수전농사의 모습을 확인하는 결정적 지표가 됐다.

옥현 유적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발견된 논이 청동기시대 전기인 기원전 7세기의 것으로 동아시아 최고의 수전유적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유적은 한반도에서 적어도 기원전 7세기 이전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논농사가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증좌가 됐다. 중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수전유적이 확인되지 않았고 일본의 경우에는 큐슈의 나바다케·이타즈케 유적, 오사카의 이케시마 유적 등이 있어 마치 일본이 논농사에서 선진문화를 가진 것처럼 알려졌지만 울산 옥현유적으로 모든 것이 정리됐다. 일본의 논농사 유적은 가장 이른 시기의 것들도 기원전 5세기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옥현 유적의 발견으로 수전경작이 한반도에서 유래되었고 일본의 그것도 한반도 남부에서 기원했음이 입증됐다. 하지만 그 소중한 유적이 지금은 어떤 모습인가. 검단리는 방치되고 있고 중산리는 원형을 거의 훼손했다. 옥현 유적은 전시관을 만들었지만 운영비 등이 부족하다며 폐관해버렸다. 한반도 고대사의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정도의 중요한 문화유산들이 이처럼 대접을 받는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자긍심을 훼손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세가지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한반도 선사문화의 중요한 유적지가 개발의 이해관계에 묻혀 방치되거나 훼손되는 상황이다. 다행히 검단리 유적은 활용방안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 되는 상황이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살펴 지역의 역사 교육의 장은 물론 한반도 선사문화의 새로운 콘텐츠로 거듭날 수 있게 만들어가야 할 시점이다. 김진영 편집이사

사진 제공 울산시 부산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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