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2년, 울산은 여전히 고군분투 중

2022년 새해가 밝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울산지역은 타시도 보다 방역에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만큼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방역 최전방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를 넘긴 후에도 시민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울산대학교병원 차수정 간호사와 임시선별검사소의 손영희·이지윤 간호사를 만났다.

울산대학교병원 차수정 간호사

◇울산대학교병원 차수정 간호사
-지난 2년 동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코로나19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좀 많이 달라졌어요. 처음에는 내가 먼저 걸릴까봐 무섭고 두려워서 약속도 자제하고 집에서도 늘 조심했어요. 아무리 씻었다지만 찝찝해서 마음이 계속 불편하더라고요. 가족들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코로나19가 터진 첫 해에는 병원에서 제공해 준 기숙사에서 6개월 정도 생활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좀 적응이 됐어요. 일상화가 된 거 같아요. 방호복을 입고 읍압병실에 들어갈 때는 걱정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겉옷 입듯이 자연스러워요. 그만큼 가족들 반응도 많이 달라졌어요. 처음에는 ‘네가 거기 있어도 되겠냐’며 전전긍긍하셨는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요즘처럼 확진자가 많이 나올 때는 그만큼 바쁘겠구나 해요.”

-지금까지 가장 고비였을 때는?
“양지요양병원 집단감염 터졌을 때예요. 대부분 연세가 많으시고 와상환자들이셔서 식사를 한훈 한분 직접 떠먹여 드려야 했어요. 기저귀 케어도 해야 하고, 욕창 때문에 자세 변경도 자주 해줘야 하고요. 무엇보다 치매까지 있는 분들이 많으셨는데 한쪽에서 환자를 보고 있으면 옆에 계신 환자가 주사를 빼고 반대편 환자는 콧줄을 빼시고.. 음압병실에 한번 입실 하면 기본 3, 4시간 있어야 했어요 그런 어려운 상황을 최소한의 인력으로 다 감당을 해야 하는 게 정말 힘들었는데 나중에는 간호부에서 급하게 도와주러 오시기도 했죠..”

-환자들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웠을 때는?
“아무래도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인데요.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특히 코로나19에 감염된 환자는 임종이 와도 보호자들과 만날 수가 없어요. 보호자도 감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인데, 그나마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CCTV예요. 그때도 환자가 전화를 받을 수 있으면 서로 소통이라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환자는 그냥 보호자가 하는 마지막 얘기를 듣고만 계세요. 제일 슬펐던 순간은 한 환자가 돌아가셔서 보호자로 아드님이 오셨는데 병실의 두꺼운 문 사이로 환자분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담아두시려고 촬영하는 걸 보고 울컥했어요. 마침 제 외할아버지가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셨거든요. 다른 질병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동안 코로나19로 면회도 제대로 못할 뿐더러 임종도 못 지키고 떠나 보냈어요. 그래서 그 마음이 너무 와 닿더라고요.”

-그동안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은?
“저희를 이끌어 주는 수간호사 선생님을 보면 버틸 힘이 생겨요. 말로만 업무 지시를 하는 리더를 만났다면 오히려 일에 대한 의욕이 떨어졌을 텐데 리더가 솔선수범하니 따라가게 되더라고요.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항상 다독여 주시고요. 그리고 같이 일하는 간호사 선생님들과 서로 의지하는 것도 커요. 방호복 입고 음악병실에 입실 한 간호사와 밖에 있는 간호사 간 소통이 굉장히 중요해요. 밖에서 전달을 잘 해줘야 되고 안에서는 그에 맞게 수행을 잘해줘야 하는데요. 보통 저희가 무전기로 소통을 하는데 가뜩이나 방호복을 입으면 소리가 잘 안들리는 데다 연결이 잘 안되면 무슨 말인지 안들릴 때도 있어요. 그럴 때 이제는 몸짓이나 억양만으로도 ‘아 이건 그거다’고 뭐가 필요한지 눈치를 챌 정도로 합이 잘 맞아요.

마지막으로 역시 환자나 보호자분들이 격려해주실 때가 아닐까 싶어요. 일하다 보면 ‘힘들지 않냐’ 한마디 해주고 가끔 편지도 써주시거든요. 한번은 초등학생 환자가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갈 때 편지와 간식을 주던데 마음이 참 고마웠어요. 또 가족들의 지지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응원도 있어서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울산 임시선별검사소 손영희 간호사

◇임시선별검사소 손영희·이지윤 간호사
-임시선별검사소 운영 이후 첫 겨울 힘든 점은?
손영희:최근에 한파주의보가 왔을 때 바람이 정말 많이 불고 추웠어요.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몸에 붙이는 핫팩을 사용하기도 하는데요. 검사는 손으로 하다 보니 손 시려운 건 방법이 없더라고요. 핫팩을 쥐었다가 할 수도 없다 보니 그런 부분이 힘들었어요.

-민원인들 때문에 힘든 경우도 많다고 들었는데?
손영희:아무래도 검사할 때 코를 깊게 찌르다 보니 아픔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중에서 욕하시는 분들도 많으시고, 때리고 가는 분들도 있어요. 최근에는 검사하러 학교에 간 적이 있는데, 한 학생을 검사하던 중에 그 학생의 어머니가 ‘입으로만 검사하겠다고 했는데 코까지 검사했다’고 멱살을 잡은 적도 있어요.

이지윤:검사 전에 어머님이 학교 보건 교사와 얘기를 나눴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가 저희한테 전달이 안됐었어요. 그래서 언성을 높이셨던 거죠. 그런데 공문에 보면 ‘검사를 코 위주로 하되 영유아만 입으로 할 수 있다. 꼭 입으로만 검사를 받아야 할 경우 의료진에게 협의를 구해야 한다’고 설명되어 있어요. 하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달랐죠. 검사는 코까지 하는 게 기본이에요.

손영희:검사소에 오시는 분들 중에서도 코를 깊이 찌르다 보니 아픔을 호소하시면서 욕하는 분들이 많아요. 듣다 보면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가 없어요. 한번은 검사 받으러 자주 오시는 분이 검사를 하면서 본인 코에 다른 걸 넣었다고 생각을 하셨나 봐요. “내 코에 뭐 넣었어? 경찰 불러”라면서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그 뒤로 그분은 검사 받으러 오시면 면봉을 본인이 고르세요.

-반대로 힘이 되어주는 분들도 많으실 거 같은데?
이지윤:지난달에 저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인데 명촌에서 작은 반찬가게를 하시는 분이 동지라고 팥죽을 한가득 포장해서 주시고 가셨어요. 또 전날에는 가방에 따뜻하게 데운 캔커피를 주고 가셨고요. 정말 감사하죠.

손영희:저희는 원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단지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셨으면 하는 거죠.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십니다’ ‘아유 고생하세요’ 이렇게 말해주시는 분들도 많으세요. 그러면 우리도 고마워서 더 크게 ‘감사합니다’ 외쳐요.

-검사 받으시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지윤:‘네 코 아니라고 막 찌르는 거 아니냐’ 이런 말 정말 많이 들어요. 저희가 남의 코라고 일부러 깊게 찌르거나 막 하지 않아요. 검사방법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진행을 하는 건데 ‘나는 왜 더 깊이 찌르냐’부터 시작해서 안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하시면 정말 많이 힘들어요. 심적으로 무너지거든요. 검사를 하는데 위축도 되고요. 저희도 최대한 아프지 않게 하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으니 이해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정확하게 검사를 해야지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있으니까요. 선별검사소를 설치한 이유가 숨은 감염자를 찾고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서잖아요. 검사를 확실하게 해야지 제대로 운영이 되는 거니까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손영희:연말 동안 확진자가 많이 나오면서 검사자 수도 굉장히 많았어요. 하루에 2,000명 가까이 올 때도 있었는데 10여명 되는 인원이 나눠서 하다 보니 인력이 부족하다는 걸 많이 느껴요. 검사소가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쉬는 시간에도 밀려 있는 다른 업무들을 서로 도와줘야 해요. 접수 받으시는 분들은 손가락이 휘었고, 검사자들도 계속 같은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까 어깨부터 목, 팔, 다리가 아파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희가 검사를 많이 할수록 확진자가 줄어드는 눈에 보여서 버틸 수 있는 거 같아요. 울산이 코로나19로 힘들 때 도움 되는 일을 한다는 게 스스로에게 보람도 크고요. 코로나19가 당장 끝날 것 같다는 느낌은 없어요. 올해도 계속 이렇게 보내야 하는데 의료진들과 시민들이 좀 더 힘을 내서 같이 이겨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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