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영남읍지’ 속 울산지도에는 장생포앞 죽도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10000년 전 바다가 고래등처럼 솟은땅
천지먼당 한 개먼당 장생 등 낯선 이름
오래된 영물의 신앙적 대상이었던 흔적

 

 내 고향 바닷가 외딴 섬 하나 / 뽀오얀 물 안개 투명한 바닷속 / 바위에 앉아서 기타를 퉁기면 / 인어 같은 소녀가 내 곁에 다가왔지 / 환상의 섬 환상의 섬 환상의 섬(이하 생략)
 화려했던 과거는 네온처럼 사라진다. 환상의 섬은 소년의 펄떡거리는 심장에서 들었다놨다를 반복하지만 기타 줄을 튕기는 각도가 달라지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비릿한 절망감을 윤수일만 느꼈을까. 지난 2009년 장생포는 이름을 뺏길 뻔했다. 쇠락한 고래잡이 항구는 하나둘 주민들이 떠나자 2,700여명으로 쪼그라들었다. 남구청이 시내 쪽의 야음1동(인구 1만9,000여명)에 장생포를 흡수하고 이름을 지우려 하자 장생포를 탯줄로 삼은 이들이 들고 일어났다. 윤수일도 그중 한 사람이다. 고래고래 목청을 뿌리던 윤수일의 고향은 환상의 섬 죽도와 마주한 장생포 본동이다. 돈 벌러 간 어머니의 빈자리는 장생의 앞 포구와 고랫배의 흐드러진 쇳소리, 항구의 질펀하고 왁자한 소란이 차지했다. 환상의 섬으로 부르던 죽도에는 대나무와 해송, 동백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봄 볕에 빨간 동백을, 여름 볕엔 찬란한 햇살을, 가을 녘엔 우르르 휘몰아치는 귀신고래 울음이 빈자리를 채웠다. 그 죽도가 매립되고 굴뚝이 삐죽 자리한 하늘에 윤수일은 환상의 섬이 어디로 갔냐고 쉰 소리로 목놓아 곡을 했다.
 누구는 장생포를 장승개에서 왔다고 이야기하지만 근거는 불확실하다. 장생은 한자로 장생(長生)이다. 길게 생긴 동물이기도 하고 장승의 한자 표기이기도 하다. 그만큼 해석이 분분하니 이야기가 굽이친다. 사실은 장생이라는 단어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 지명은 아니다. 고지도나 지리지에는 대현이라는 이름이 전하고 그 하부 마을의 이름 어디쯤 장생포가 익숙한 지명으로 불려왔던 것으로 전한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야음장생포동이지만 본래 이곳은 경상남도 울산군 현남면 지역으로 오랫동안 장승개 또는 장생포라 불렀다. 
 좀 더 오랜 과거를 더듬어 보면 장생포는 지도에 없다. 10000년 전 바다가 사연을 지나 언양일대까지 찰랑거리던 시절, 장생포는 그저 바닷속에 있던 땅이었다. 물이 빠지고 울산만 일대가 오밀조밀해지면서 장생포는 지금의 모습이 됐다. 근대사에서 장생포는 방어진과 함께 울산만의 좌우 외항으로 군사적 요충지는 물론 어항이자 물류의 중심지였다. 조선 태종 7년에는 이 일대에 수군만호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4년에 시행된 전국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울산군 대현면(大峴面) 장생포리가 됐다. 장생이 공식화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면서 장생포동으로 개칭돼 행정동인 장생포동 관할이 됐다. 1998년 야음1·장생포동에 들어갔으며, 이후 야음장생포동으로 관할이 바뀌었다.
 장생포는 풍수적으로 사람과 물산이 모여드는 형상을 하고 있다. 반구대암각화에서 이어진 물길이 태화강을 굽이치다 동천강과 여천천 외황강과 뒤섞여 흘러드는 땅이 장생포다. 그 하구는 질펀하고 풍요로운 충적평야와 갯벌이 첩첩이다. 매암동과 용잠, 고사동에 둘러싸인 천혜의 땅에는 일찍부터 인간의 욕망이 넘실댔다. 러시아의 포경선단이 동해남단의 전진기지로 낙점한 땅에 일제가 군침을 흘렸고 근대화의 물결과 공업입국의 군사정권이 바다를 덮고 굴뚝을 세웠다. 이 때문에 장생포는 동해남부선과 울산항선의 종착지로, 장생포역과 울산항역이 남아 있고 동해안으로 뻗은 장생포로(長生浦路)가 31번국도와 부두로와 이어진다.  
 울산의 고지도와 지금의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특별한 발견을 하게 된다. 바로 고래 때문이다. 10000년 전, 고래가 울산만에서 연안으로 유영하던 시절, 지금의 사연댐 일대와 한실마을 언저리까지 미역이며 다시마며 뭉실한 해초가 가득했다. 그 연안에 새끼를 품고 반원을 그리던 귀신고래, 신선한 식감이 윤기로 흐르는 해초더미를 새끼에게 먹이려는 향유고래까지 울산만은 고래천지였다. 그 증좌는 바로 반구대암각화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그 고래의 임계점이 장생포로 변한 건 동해의 해수면이 낮아지면서부터다. 육지가 드러나고 장생포가 대륙의 끝자리가 되자 선단이 몰려왔다. 구한말인 1891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일본으로 가다 장생포 앞바다에서 큰 고래 떼를 발견한 것이 근대 포경의 역사라는 기록은 가짜뉴스다. 장생포와 고래의 인연은 러시아 황족이 아니라 이 땅의 사람들이 훨씬 앞섰다. 
 천천히 숨을 죽이고 장생포 일대를 걷다 보면 낯선 이름과 마주한다. 매립된 죽도에 남아 있던 신주당은 고래풍어제를 지내던 사당이었고 천지먼당과 한 개먼당 같은 가물거리는 의미로 다가오는 이름들도 펄럭인다. 어쩌면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은 반구대암각화 어디쯤에서부터 시작된 울산의 고래문화를 질긴 유전인자로 이어온 사람들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상징이 전설처럼 남아 있는 증좌가 귀신고래다. 귀신고래(Korea Gray Whale). 이름에 대한민국을 뜻하는 '코리아'가 들어 있는 가슴 벅찬 고래다. 길이가 무려 20m, 몸무게는 14~35t에 달한다. 대형 잠수함 같은 거구가 동해바다를 뚫고 치솟는 장관은 압권이다. 바로 그 바다, 귀신고래가 하늘로 웅비하던 그곳이 고래바다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귀신고래는 울산의 고래바다에 더 이상 오지 않는다. 기록에 전하는 바로는 1912년 한 해 동안 무려 188마리의 귀신고래가 작살에 끌려 육지에서 해체됐다. 남획의 결과는 참담했다. 영민한 귀신고래는 남쪽 바닷길의 임계점을 북쪽으로 끌어 올렸고 더 이상 울산 앞바다에서는 만날 수 없게 됐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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