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울산여지도] 범서, 아우라지 돌아가는 소읍국(小邑國)의 땅
태화와 대곡의 합수지세, 양생의 땅 조선시대 역참 굴화원이 있던 자리 구영 천상 주거지 독특한 풍수 길지
풍수(風水)를 살필 때 물은 산과 함께 핵심이다. 산은 사람을 키우고 물은 재물을 쌓는다는 옛말은 그래서 유효하다. 물이 재복의 길흉을 판별하는 핵심이 된 것은 흐름 때문이다. 굽이치고 모였다가 멈추고 휘도는 성질은 인문과 지리의 생기를 관장한다. 그 물은 바로 산의 골짜기를 타고 길을 연다. 산이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을 수 없는 이치다. 물은 한 가닥으로 뻗지 않는다.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모이는 자리는 그래서 길지다.
문명을 일으킨 물길도 급수가 있다. 나일처럼 거대한 피라밋 문명을 만든 물길도 있고 메콩의 물길처럼 범람을 반복하며 토양을 갈아엎어 비옥한 수확물로 인류를 구하는 물길도 있다. 물길의 형태는 울타리를 친 듯 산등성이나 벌판을 휘감아 흐르는 금성수(金星水)가 최상급이다. 금성수는 산으로부터 지맥이 뻗어 물길이 휘도는 길지다. 안동 하회나 온양의 회야, 한강의 압구정과 광나루 등이 그렇다. 오늘 울산여지도가 열네번째로 조망하는 땅 범서가 바로 물길이 빚은 길지다.
범서로 가는 길은 태화를 거슬러 가는 물길이다. 울산의 또 다른 옛 이름 '굴아화(屈阿火)’가 왜 이런 이름을 얻었는지는 강을 거슬러 가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굴아화는 굽은 강이라는 의미가 숨은 이름이다. '굽은(屈) 강(阿) 벌(고을, 火)’이라는 의미의 이두식 표기이다. 지금의 범서읍 선바위(立岩) 부근에서 크게 굽어 돌아가는 강줄기를 그대로 표현한 지명이다. 부족국가 형태였던 우시산과 굴아화는 지척에서 회야와 태화를 품고 세력을 키웠다. 우시산이 웅촌 검단 분지 쪽의 세력이었고 굴아화는 태화강 입암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다졌다. 신라 파사왕이 이 땅을 말발굽 아래 굴복시킨 뒤 굴아화는 굴화(屈火)로 변했다가 하곡(河曲)이라는 이름으로 변신했다. 기록에 보면 조선조 말기인 1914년의 기록에 ‘굴화리’라는 지명이 남은 것을 보면 역참(驛站) 기능을 한 굴화역의 흔적이 여전히 이어졌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신라 제5대 파사왕은 굴아화촌을 병합한 뒤 남쪽에 생서량군(生西良郡), 동쪽에는 동진현(東津縣), 중앙에 거지화현(居知火縣)을 두었다고 전한다. 그 중심인 거지화현에 치소(治所)를 두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범서다. 유추해보면 생서량군은 회야를 돌아가는 진하 이남의 땅이고 동진은 사포와 율포를 낀 동쪽의 울산을 부르는 지명으로 보인다.
범서는 이처럼 울산이라는 땅의 중심부다. 가지산에서 시작해 고헌산과 신불산, 간월산에서 흐르는 물은 언양에서 한번 숨을 고르고 물길을 동을 돌려 범서를 휘감는다. 한숨을 고른 물길이 범서에 이르면 사연쯤에서 대곡의 물길과 만나 아우라지(두 물길의 합수지점)를 만든다. 여기서부터 태화는 동해를 만나고 싶어 안달이다. 선바위와 베리끝, 용금소를 지날 때 거친 물살이 회오리를 치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이어지는 사일길과 베리끝길, 용금소길은 깊은 물살만큼 비경과 전설이 버무려져 잔잔하다가도 굽이치는 물길이 멋스럽다.
영험한 땅은 사람의 손길이 가만두지 않는 법. 태화와 대곡이 만나는 지점에서 골짜기를 바라보면 태봉산이 볼록하다. 그 봉긋한 등성이에 조선 성종의 다섯째 경숙옹주 태실비가 있다. 태실은 왕실의 탯줄을 봉안한 자리다. 전국의 길지를 찾아 탯줄을 묻었으니 땅의 지세는 영험함이 입증된 셈이다. 태실비를 지나 태화와 대곡의 두 물길이 만나는 아우라지 앞에는 범서의 안주인 격인 사일마을이 차분하게 자리 하고 있다. 사일의 터주대감 서씨고택이다. 쓸쓸하지만 중후한 고택은 이 왜 이 땅이 범서의 중심이었는지를 웅변한다. 서쪽으로 솟을대문과 사랑채, 안채, 곳간, 중문이 차례로 앉아 전형적인 사대부 고택의 모습을 갖췄다. 사일에는 서씨고택 외에도 기와집 대여섯 채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다. 밝은 마을이라는 뜻의 '사일(泗日)’은 이름처럼 시야가 탁 트였다. '달성서씨’ 감찰공파의 집성촌이다. 조선조 중기였던 250년 전 달성 서씨들이 명당을 찾아 이곳에 터를 닦았다.
그 길을 따라 물길을 풀어놓으면 백천마을에 이른다. 청동기 주거지가 쏟아진 오랜 길지이자 조선조까지 교통의 중심이었던 역사 굴화원(屈火院)이 있던 자리다. 북으로 지금의 화봉에 진동원(鎭東院)이 있었고 지척의 태화동에는 태화원(太和院)이 있었다. 신정동 월평에는 팔등촌원(八等村院)이 울산의 역마를 중계했다. 기록에는 이보다 많은 역원이 남아 있지만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생략한다. 원(院)은 교통의 요충지에 설치한 일종의 공공역무원으로 어떤 곳은 말을 관리하는 역으로 어떤 곳은 숙박을 겸한 원을 두어 마패를 수단으로 교통과 숙박을 관장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조치원이나 이태원 같은 지명은 조선조 역무 기능의 흔적이다.
합수의 길지와 역원의 요충지답게 범서는 울산의 중앙에 위치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연화산(蓮花山), 무학산(舞鶴山), 국수봉(菊秀峰), 상아산(尙牙山), 문수산(文殊山) 등의 산지에 둘러싸인 분지 형태인 범서는 구영과 천상의 두 군데 대규모 주거지로 나뉘어 있다. 마지막 팁 하나. 천상리 문수산성지에서 태화강을 바라보면 물길이 달아난다. 양생의 땅이다. 반대로 구영쪽에서 태화강을 내려보면 물길이 휘감는다. 포용의 땅이다. 그래서 남자는 구영에서 새로움을 도모하고 여자는 천상에서 빛을 찾는다는 속설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