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조건-3] 친구처럼 가족처럼 … 아이들 곁 묵묵히 지켜준 버팀목
지난해 2월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의 초등학생 자녀 28명이 한꺼번에 울산의 서부초등학교에 배정되면서 기존 학부모들의 반대가 거셌다. 이들을 이해시키는 과정이 우선되지 못한 탓이었다. 지역 사회와 진통을 겪는 과정에서 누구보다 불안해했을 아이들 곁을 묵묵히 지켜준 이들이 있다. 특별기여자들이 한국에 처음 왔을 때인 충북 진천에서부터 울산까지 함께 해 온 김호산나(22) 통역사와 울산에서 특별기여자 학생들을 맡은 서부초등학교 박지영(41)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아름다운 밤 '샤보나'로 살다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이 한국이라는 낯선 땅에 온 후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대부분 '언어'를 꼽았다.
말이 통하지 않다 보니 물건을 사러 슈퍼에 가는 것도, 몸이 아파 병원에 가는 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매순간 불편했다. 이때 이들 앞에 나타난 통역사 김호산나(22)씨는 그야말로 어둠 속 한줄기 빛 같았다.
그래서일까. 특별기여자들은 충북 진천, 전남 여수를 거쳐 울산까지 함께한 김씨를 '샤보나'라고 불렀다.
달이 밝게 비추고 별이 반짝 반짝이는 아름다운 밤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3살부터 13살까지 10년간 아프간 북쪽 국경과 접한 타지키스탄에 살면서 페르시아어를 익혔다.
덕분에 한국에서 대학을 입한한 후 휴학을 하자마자 통역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김씨는 "지금 생각하면 아프간 분들은 400명에 가까운데 통역사는 3, 4명밖에 없으니까 저희만 보이면 불러서 '좀 도와 달라'고 했다. 통역사가 없으면 의사 전달이 아예 되지 않으니까 의지를 많이 했던 거 같다"고 떠올렸다.
특별기여자들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가 두 달을 머물렀다. 이후 10월 27일 전남 여수 해양경찰교육원으로 임시 생활 터전을 옮겨 4개월간 한국 사회 정착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김씨는 이 모든 과정에 함께했다. 진천에서 2주간 수업 통역만하기로 했지만, 금세 특별기여자들과 친해져 자연스럽게 여수까지 함께해 생활 통역까지 맡은 것이다.
하지만 여수 생활이 끝나고 아프간 사람들이 취직을 하면서 인천, 남양주, 시흥, 용인, 울산 등으로 각각 흩어졌다.
그는 "지난해 2월 여수에서 헤어지고 나서 나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3월 말쯤 정부합동지원단에서 연락이 왔다. '울산 초등학교에 아이들이 많이 가는데 통역사가 없다. 가줬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6월부터 서부초에서 통역일을 하고 있다. 살면서 울산에 한 번도 와본 적 없었지만 아프간 사람들이 많은 만큼 도움도 많이 필요할 거 같다는 생각에 고민 없이 한걸음에 왔다"고 웃어 보였다.
높고 굳건하게만 느껴졌던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의 언어장벽은 울산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무너졌다.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스펀지 같은 흡입력으로 한국어를 빠르게 익혀갔고, 부모님들도 동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한국어 수업을 받으며 공부한 덕분이었다.
그만큼 통역사의 역할은 줄어들었지만, 반대로 이들이 울산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김씨는 "내가 울산에 왔을 때는 아프간 사람들이 한국어 공부나 한국 사람들과 교류를 많이 했던 터라 듣기 실력이 많이 늘어 있었다. 그래서 통역하려고 하면 '나 알아들었어'라고 말하는 분들이 꽤 생겼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한국어로 수업을 하고 선생님 농담도 다 알아듣는 수준이었다. 그런 모습 보면 조금 오버해서 한국 친구들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집마다 통역사들이 다 있다. 아이들이 직접 부모님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데 나중에 저 대신 통역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면 '나중에 샤보나 자리에 내가 있을 거야'라고 농담도 한다"고 했다.
김씨와 아프간 사람들과의 관계는 특별하다. 그는 "아프간 사람들은 '정 빼면 시체'다. 손님 문화가 발달돼 있어서 항상 집으로 초대해 '밥먹자', '차 마시자'고 한다. 우리 70, 80년대 모습 보는 것 같다. 특히 진천, 여수에서는 같이 생활하다시피 했고 힘든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일로써만 볼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관계다. 처음부터 성장해가고 있는 모습을 쭉 봐왔는데 너무 고생 많았고, 노력 많이 한 게 항상 느껴져 자랑스럽다고 얘기하고 싶다. 앞으로도 한국 언어와 문화를 더 배워서 한국 사람들과 잘 어우러져서 지냈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커 가면서 주변에서 칭찬도 많이 받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한국문화적응반 꽃들의 바라기
서부초에서 아프간 아이들을 맡은 한아름3반 한국문화적응반의 담임 박지영 선생님은 자신을 '꽃들의 바라기'라고 표현했다. 꽃 화분 하나 키워본 적 없지만, 꽃처럼 예쁜 아프간 학생들이라는 꽃밭을 가꿨기 때문이다.
박선생님은 주민들의 반대와 우려 속에 시작됐던 지난해 3월 21일 첫 등교를 떠올리며 "아이들이 마스크를 하고 있지만 눈만 봐도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학생들은 한국 친구들을 만나는 기대감과 설렘을 표현하기 위해 각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방에 작은 과자 주머니를 준비했다. 그 모습을 보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구나"를 느꼈다고.
이들을 처음 만난 한국 학생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쉬는 시간마다 교실 뒷문에 서 서로 이름을 부르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본 박 선생은 "너무 귀엽고 순수해보였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순수한 모습에 직접 감동을 많이 받은 순간들도 있었다.
그는 "여름 방학을 앞두고 그동안 선생님은 학교 못 나온다고 이야기 하니 학생들이 제가 더 이상 학교를 안 나오는 줄 알고 작은 메모를 써가지고 왔다. 그 중에 '박지영 선생님 당신이 떠나면 나는 당신을 그리워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번역기를 사용해서 쓴 멘트 같았는데도 참 마음에 와 닿았다"고 회상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 학생들이 박 선생님의 표정과 말투를 살피는데, 가끔 일에 집중하고 있어 인상을 쓰고 있을 때는 다가와 "선생님 슬퍼요?", "선생님 뭐 도와줄까요?" 얘기를 건넬 만큼 애살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1년 동안 가장 많이 변화한 것은 물론 한국어 실력이기도 하지만, 박 선생님은 '음식'을 꼽았다.
그는 "우리도 외국 나가면 향이 강한 그 나라 음식은 잘 먹지 못하지 않나. 더구나 이 학생들은 돼지고기라는 음식 자체를 멀리하는 문화다 보니 한국 음식을 대하기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먹으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분간 집에서 아프간 음식으로 도시락을 싸오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학생들을 안심시키고 스스로 마음을 열게 하는 시간을 주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점점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음식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지자 5월 1일부터는 결단을 내렸다.
한번은 반찬으로 김이 나왔는데 학생들이 종이라고 인식해 "선생님 검정색 종이 뭐예요?"라고 물었던 적도 있었다.
박 선생님은 "그럴 때는 먼저 먹는 걸 보여주면서 조금씩 권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김 하나 더 받고 싶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잘 먹는다"고 미소 지었다.
김치도 마찬가지. 한 학생은 김치 등 한국 음식을 다 잘 먹는 데다 엄마가 직접 김치를 담그기도 했다며 "선생님 저 이제 한국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스스로 했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는 자신과의 전쟁 같은 시간이었을 테지만 잘 이겨내 대견한 마음뿐이다"라고 전했다.
우려했던 학부모들의 반응도 사뭇 달라졌다.
박 선생님은 "지난해 말 학교 축제를 했는데 당시 학부모들도 찾았다. 당시 아프간 학생들이 한국 친구들과 부스 체험을 같이하는 모습 등을 보고는 되게 흡족해 하고 '아이들이 잘 적응해서 너무 보기 좋다'라고 말을 해 감사함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제는 선생님이라기보다 친구, 가족 같은 기분이 든다는 그는 마지막으로 "처음에 많이 힘들었을법한 시간이었지만 여러 선생님을 믿고 잘 따라와 줘 고맙다. 아이들이 재능이 뛰어나고 학습능력도 정말 높다. 1년 동안 한국어도 한국 문화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한만큼 앞으로도 한국에서 튼튼하게 잘 뿌리를 내려서 큰 무리 없이 적응하길 바란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두 사람의 인터뷰가 담긴 영상은 울산매일 UTV 채널(youtube.com/iusm009)과 QR 코드, 홈페이지(www.iusm.co.kr), 인스타그램(@ulsan_maeil)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신섬미기자01195419023@ius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