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울산여지도] 반구, 신라와 세계를 연결한 해문(海門)

물산을 중계한 지정학적 요충지 세계 4대 도시 관문역할 한 항만 울산의 역사적 위상 보여주는 땅

2023-02-22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반구동 일대 아파트부지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항만 유적의 현재 모습.  이수화 기자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한반도 과거사의 모든 것을 정리해 둔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해마다 고대사 교양강좌를 연다. 이 강좌에서 울산은 단연 인기다. 지난해에는 소재구 전 국립고궁박물관장이 강사로 나서 '신라의 관문 울산’이라는 강좌를 열었다. 호응이 대단했다. 이 강좌에서 다뤄진 내용은 거의 대부분이 고대도시 울산의 위상에 대한 내용이었다. 세부 내용을 보면 <경주 최단거리 해안 대고을>, <울산 반구동 항만 목책 유적, 완도 청해진유적과 유사>, <신라 대외교류의 관문 - 일본, 중국 및 아시아를 상대로 한 교역항>, <울산을 통한 아라비아 교역 사례> 등이다. 여기에 <반구동 항만 목책유적>이 등장한다. 오늘 울산여지도가 열 다섯번째로 밟아보는 땅, 반구동이다. 

 울산 사람들은 울산이 고대사의 보물 같은 땅이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그저 대한민국 공업화의 산실이자 산업수도라는 타이틀을 붙잡고 있을 뿐, 1,000년전의 울산에 관심이 없다. 경주나 서울의 박물관에서 신라 천년을 이야기하고 그 찬란한 영화의 증좌로 로만글라스나 옥구슬이 주렁한 금관을 출렁거리면 황홀하게 바라볼 뿐이다. 바로 그 보물들이 신라의 해문(海門) 반구동 항만을 통해 경주로 옮겨진 사실을 까맣게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로만그라스는 신라 천년의 해상무역을 규명하는 증거물이다. 1만㎞ 이상 떨어진 서라벌과 베네치아가 어떻게 같은 유물을 공유했나를 의문부호로 던진 해답이 울산에 있다. 천년왕국 신라는 그 많은 황금과 철을 어떻게 조달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울산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학자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한국사를 연구하는 소장파 학자들은 도대체 어떤 경로로 신라가 황금의 나라가 됐고 아랍의 왕자와 거상들이 서라벌을 오갔는지 실체가 궁금했다. 경주와 울산, 그리고 포항 일대를 뒤지며 금광을 찾고 사금의 분포나 철광석 광산을 살펴 황금과 철의 왕국, 신라의 과거를 연결해 나갔다. 일제의 사주를 받아 임나일본부만 뒤지던 친일학계는 슬쩍 외면했지만 현장을 누빈 소장파 학자들은 울산의 해안을 주목했다. 개운포라는 외항과 함께 물산을 중계한 반구동 일대가 옛 신라의 사포나루였고 그 해안에서 엄청난 항만시설이 나오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1,000년전 바다와 접한 바로 반구동 항만 유적이다. 

 6세기 이후 8세기 무렵까지 신라는 고도성장을 이뤘다. 8세기 무렵에는 서라벌이 세계 4대 도시로 우뚝했고 아랍 상인들은 동방의 끝 신라 땅은 황금이 걸개로 걸려 넘실댄다고 입소문을 냈다. 그 소문의 뿌리에 위치한 땅이 반구동 항만이다. 그 엄청난 땅의 역사는 왕조가 망하자 몰락의 상징으로 버려졌다. 고려조 이후 유배의 땅으로 버림받던 이 땅은 박정희 장군의 검은 장갑에 굴뚝도시로 변모해 가난을 지운 영광의 도시로 재탄생했다. 20여년전, 반구동 일대에서 천년을 땅속에 묻혀 있던 국제무역항의 면모가 드러나기 전까지의 역사다. 

 지난 2006년 물산 좋기로 이름난 반구정 아래 동네에 개발 바람이 불었다.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가 지표 조사를 거쳐 본격적인 시굴 조사에 들어갔다. 연화문 수막새가 나오더니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목책시설(木柵施設 경계나 방어 등을 위해 설치한 시설)을 비롯한 토성, 건물지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됐다. 삼국시대 축조된 건물지는 지금의 울산항이 보이는 구릉의 바위 위에 축조된 건물의 흔적이었다. 경주를 제외한 지역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되는 연화문 수막새가 대량 출토된 일은 반구동이 처음이었다. 

 단연 독보적인 흔적은 목책시설이었다. 강을 따라 이어진 경계 부분에서 발견된 목책은 동천 쪽에서 시작해서 울산왜성 쪽으로 이어졌다. 2열로 조성한 이열목책(二列木柵)이며, 목책열 사이의 간격은 4~5m이다. 일반적으로 목책은 토성(土城)이나 석성(石城)에 비해 임시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반구동 목책 시설의 경우 구조의 견고함이나 구릉을 감싸고 있는 형태로 볼 때 장기간 유지를 염두에 둔 해안의 항만시설과 연결된 성곽일 가능성이 높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제시됐다. 항만과 성곽이 동시에 존재한 고대 유적은 대한민국 발굴의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전까지 사료를 바탕으로 개운포의 국제무역항 기능을 인지했던 학자들은 개운포에서 반구동 항만으로 이어진 외항과 내항의 체계화된 항만도시가 1,000 년전에 존재했다는데 놀라움을 드러냈다. 

 딱하지만 그런 땅을 개발의 불도저들이 밀어버렸다. 뜻 있는 일부 학자들과 향토사학자들이 일본의 요시노가리처럼 제대로 발굴해 유적지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파트 업자들의 삿대질과 개발의 달콤한 이익금에 행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1,000년전 세계를 호령한 국제항이 아파트 단지 한쪽에 웅크린 채 몰락한 양반가의 족보처럼 구겨져 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반구동은 동천과 태화가 합수하는 큰 물줄기의 아우라지다. 합수지점은 으레 찰진 땅을 만들어 반구동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물산이 풍부했다. 품질도 넉넉해 반구동에서 자란 배추는 서울 도매시장에서 곱빼기로 값을 받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반구동 배추는 잎이 얇고 속이 겹겹이 싸여 당도도 높아 동해안 일대에서는 가장 맛있는 작물로 소문이 자자했다. 배추만 아니라 구교마을 특산품인 산수박과 참외는 없어서 못 팔았다. 1980년대까지 만해도 처용암에 놀러온 전국의 나들이객들이 반구동 산수박과 참외 하나는 먹고 가야 한다고 줄을 설 정도였다. 이런 연유에선지 물 좋고 물산까지 풍부한 반구동 일대가 인심 좋고 어여쁜 '울산큰애기’의 뿌리라는 말이 동천강 하류에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