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통합의 아이콘, 박상진 의사

울산 애국열사 박상진 의사 공적 의미 좌우분열 통합 광복회 구성 독립 앞장 국민소통 · 화합 최선 국력성장 기대를

2023-03-16     조규성 울산박물관장

 

조규성 울산박물관장

   우리나라에는 3월 1일 삼일절, 6월 6일 현충일, 8월 15일 광복절 이렇게 보훈의 달이 세 번 있다.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찾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분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시간이다. 

 최근 정부에서는 보훈처를 보훈부로 격상시킨다고 한다. 참 잘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왕 승격되는 마당에 보훈부에서는 애국지사를 향한 더 높은 그리고 더 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한다. 

 애국지사의 생전활동뿐만 아니라, 사후 그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재평가했으면 한다. 

 필자는 아래 비교되는 장례식 몇 장면을 통해서 애국지사의 새로운 면을 보고자 한다. 

 양심 없는 매국노 이완용(1858~1926) 그는 한평생 호의호식하다, 장수를 누린 후 69세에 사망했다. 1926년 4월 11일 13시쯤 당대 최고 의사 3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일본 측은 즉시 국장(國葬)을 결정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독 유아사 구라헤이를 위원장으로, 박영효를 부위원장으로 한 50명의 장의위원회를 꾸렸다. 장례는 화려했다. 

 운구행렬은 2월 18일 옥인동 집을 떠나 광화문을 거쳐 용산역에 도착했다. 영결식 후, 그의 시신은 익산으로 떠나는 기차에 실렸다. 다음날 생전에 명당이라고 잡아둔 익산군 낭산면 산에 묻혔다. 장례행렬은 가히 엄청났다. 의장대는 장송곡을 연주했고, 곡비(哭婢:직업적으로 상갓집에서 곡을 해주는 사람)들은 곡을 했다. 참여자 1,000여명이 인력거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장례과정을 조선총독부에서는 기록으로 남겼는데, 장례행렬이 1.5㎞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 황제 순종의 1926년 6월 10일 인산일 장례행렬 다음으로 그 행렬이 길었다고 한다. 

 반면, 양심 있는 애국지사는 일반적인 장례조차도 거부한 채 조용히 떠났다. EBS 방송 ‘역사채널e’에서 ‘파락호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독립운동가 김용환(1887~1946) 지사의 이야기다. 

 그는 경북 안동지역에서 ‘독립후원 의용단’을 만들어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했다. 불행하게도 1922년 일본군에게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본의 감시를 받아 독립운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음에도 불구하고, 김 지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가족과 지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도박에 빠져 살아가게 된다. 결국 전 재산을 도박에 쏟아부었다. 심지어 외동딸 시집보낼 돈조차도 모두 노름판에서 날렸다. 명문가 장손이라는 명예도 버리고,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노름꾼이라는 경멸을 받으며 살았다. 

 노름꾼의 비밀은 사망 후 세상에 알려졌다. 1946년 임종 무렵, 독립운동 비밀동지였던 하중환(河中煥)이 찾아와 노름으로 전 재산을 탕진한 것이 아니라 만주 독립운동에 돈을 보낸 사실을 밝히자고 했을 때도 끝까지 이야기할 필요 없다는 말을 남기고 60세로 눈을 감았다. 1948년 탈상할 때, 하중환 지사가 제문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잃어주기 노름’을 한 것이라고 세상에 알렸고, 1995년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추측건대 유교문화가 뿌리 깊은 안동 땅에서 집안 장남으로서,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해  가족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자 했을 것이다. 더 이상 가족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간소한 장례를 희망했을 것이다. 

 이완용의 화려한 장례와는 비교되는 초라한 그러나 ‘값진 장례’이다. 

 울산에도 기억할 만한 장례가 하나 있었다. 아마도 박상진(1884~1921) 의사가 떠오를 것이다. 평생 유복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개인의 행복을 뒤로한 채 독립운동의 험한 길을 걸었다. 

 그는 광복을 위한 비밀단체 광복회를 조직하여 총사령으로서 목숨 걸고 활동했다. 그러나 애통하게도 1918년 봄 일본경찰에게 피체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러나 장지조차 구하지 못하는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고, 8월 20일이 되어서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일제의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땅을 치며 통곡했고, 멀리서도 부조하면서 장례는 치렀다. 

 이렇듯 애국지사들의 장례식을 볼 때, 그분들의 죽음조차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말 나온 김에 한마디 한다면,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극심한 갈등과 분열 시대에 박상진 의사의 공적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제강점기 망국의 한을 풀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움직임도 여러 갈래로 진행됐다.

 당장 의병을 만들어 일본을 물리치자는 사람들과 아니다 지금은 힘이 없으니, 우리 자체의 힘을 기르면 자연스레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사람들, 크게 두 부류의 국권회복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광복을 위해 조금의 힘이라도 모아야 할 판이지만, 이 두 부류는 도저히 합쳐질 것 같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흘러온 줄기가 달랐다. 당장 의병군대를 만들어 힘으로 일본을 몰아내자는 사람들은 조선 말기 쇄국정책을 지지하는 위정척사파의 영향을 받았고, 자체적으로 힘을 기른 후 후일을 도모하자는 사람들은 개화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끝까지 각자의 주장을 펼쳐 통합되지 못할 것 같았다. 이런 분열 상황을 통합으로 이끈 사람이 바로 박상진 의사이다. 

 의병을 일으켜 국권회복 운동을 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한학자 왕산 허위(許蔿·1855~1908) 선생의 문하생으로서 반외세 민족의식을 키웠고, 양정의숙에 입학해 법학, 경제학 같은 신학문을 공부했다. 

 이러한 양쪽을 경험한 이력을 바탕으로 여러 사람을 끈질기게 설득했고, 마침내 의병활동 참여자, 독립자금 후원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광복회라는 하나의 구심으로 모았다. 군대를 만들어 일본을 힘으로 물리쳐야 한다. 그러나 당장은 힘이 없으니, 힘을 기른 후에 하자 이렇게 설득했고, 그것이 먹혔다. 

 그 결과 이진룡, 김좌진 같은 분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 

 광복회 조직은 일반단체와 다르게 군대식 조직이었다. 직위도 총사령, 부사령 이렇게 군대식으로 마련했다. 국내에서는 비밀 조직을 만들어 자금을 조달했고, 만주지역에서는 군대를 만들어 훈련시켰다.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의 힘을 하나로 만든 것이다. 오늘날 같은 분열의 시대에 ‘통합의 아이콘’으로 박상진 의사를 재평가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