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베개에 대한 예의

옛 선인들은 베개나 이불에 의미 부여 특별한 무늬·수새겨 기복도구로 활용 일상이 바쁠수록 더 고마워지는 베개 자주 세탁하고 솜채워주며 예의 표해

2023-06-04     이상수 수필가
이상수 수필가

  새벽 2시 15분, 엘리베이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신문이 도착한 것이리라. 베개에 머리를 누인 지 시간이 꽤 흘렀어도 쉽게 잠들지 못한다. 저녁에 마신 카페인 탓일지도 모른다. 말똥말똥한 귀속으로 초침 소리며 지나가는 자동차 경적이 쉬지 않고 흘러 들어온다. 

 "베개에 머리를 대는 순간 잠들지 않는 건 베개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매우 부지런한 이웃의 말이었다. 새벽 신문을 시작으로 우유를 배달하면서, 낮에는 농사를, 밤에는 마늘이나 밤껍질을 깠다. 아직 잠이 떨어지지 않은 무거운 눈으로 자리에서 비비적거리고 있으면, 그녀의 오토바이 소리가 여태껏 누워있냐며 기상을 재촉했다.

 어릴 때 소원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베개를 끼고 자는 것이었다. 시내에 사는 친구들은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밤늦게까지 놀다 늦잠을 잤다. 하지만 시골 우리 집은 빛이 들기 전부터 깨어나 웅성거렸다.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나야 했다. 자리에 누워있으면 새벽부터 일하고 들어온 엄마의 고단을 덜어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지 도마소리가 크게 들렸다. 

 옛사람들은 베개나 이불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기복(祇福)의 도구로 사용했다. 특별한 무늬의 수를 새겨, 잠자는 동안 길한 꿈을 꿔 소망이 이뤄지도록 기원한 게 대부분이었다. 원앙침은 신혼부부의 금슬을 위해 길게 만들어 원앙을 새겨 놓은 것으로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구봉침(九鳳枕)은 일곱 마리 새끼를 거느린 봉황 한 쌍을 마주 보도록 수놓고, 둘레에는 십장생과 완자무늬로 꾸민 것으로 자녀를 많이 두라는 뜻을 담았다.

 증조할아버지 베개는 목침이었다. 나무의 서늘한 감촉이 목으로 전해지며 체온을 유지해 주는 덕분에 주로 여름에 애용했다. 부모님은 엄마가 처녀 때 수놓은 베갯잇 속에 목화솜을 넣은 것을 사용했다. 이불솜을 타고 남은 것으론 우리 것을 만들었다. 작고 가벼워 동생과 베개 싸움을 벌이다 뜯어지는 바람에 꾸중을 듣기도 했지만 내 머리맡에서 어린 소녀의 꿈을 키워주었다.  

 침변교처(枕邊敎妻)라는 말은 아내를 가르치는 데는 베개를 베고 함이 좋다는 뜻이다. 베개송사란 부부가 함께 잠자리에 든 후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바를 얘기하는 걸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둘 다 베개의 친근한 속성을 나타낸 것이리라.  

 저녁 이내가 내리면 베개를 껴안고 앉아 푸르스름한 창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지난 4월은 유난히 바쁜 달이었다. 새로이 시작한 도서관 업무를 파악하며 상주 작가 워크숍에 다녀왔고, 초등학교 총동창회 화합의 날에 우리 기수가 주관업무를 맡으면서 총무인 내가 할 일이 많았다. 틈틈이 청탁받은 원고를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주일에 한 번 진행하는 재능기부를 제외하고라도 새로 시니어 독서클럽 2개 반을 결성하면서 신경 쓸 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바쁘게 쫓아다녔던 낮의 일들이며, 친구와 사소한 오해며, 멀리 나가 있는 아이에 대한 걱정까지 보태어질 때 베개는 위안을 준다. 베개는 가까이에서 나를 보살펴 주는 든든한 벗인지도 모른다. 하루를 돌아보고 다시 내일 스케줄을 짜는 시간이 늘 그의 옆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런 게 좀 미비했네’ ‘내일은 이렇게 하는 게 어때?’ 그래서일까. 내 안의 걸 다 털어내고 무한신뢰를 보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신사임당은 풀, 벌, 곤충들과 가까이하며 초충도에 담았다. 월트 디즈니는 한 낡은 차고에 들락거리는 쥐들과 가깝게 지내다 미키마우스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베개가 내게 조력자인 것처럼 두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벗이었고, 결국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하게 됐다. 

  일상이 바쁘고 힘들수록 베개가 고마워지곤 한다. 피곤한 하루를 받쳐주기도 하지만 깨끗함과 더러움을 탓하지 않고 온전히 나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자주 세탁하고 솜을 꺼지면 채우며 늘 머리맡에 두는 것은 베개에 대한 나의 예의다. 새벽 3시가 넘어가고 있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내팽개쳐진 베개를 끌어당겨 머리에 받쳐주니 편안한 호흡으로 돌아온다. 나는 곧 있을 프로젝트에 대한 걱정으로 잠들지 못한다. 주제는 적당한가, 많은 이들이 와 줄까, 준비한 다과는 혹 소홀하지 않을까.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다. 문득, 뒤척이는 꿈속으로 누군가 건너와 내 몸을 편안하게 받쳐준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그제야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