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울산여지도] 입암, 독립의 혼이 바위로 우뚝한 땅

선바위 중심 용의 기운이 가득한 땅 태화 물줄기 굽이친 신령스런 지세 유난히 독립운동가 많이 배출된 곳

2024-03-06     김진영 논설실장
김진영 논설실장

 대한독립의 함성이 터져나온 삼월이다. 전국적으로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발굴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가까운 대구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구국운동기념관 설립을 제안했고 양산과 밀양은 독자적인 독립기념관을 지었다. 대구에는 일제강점기 때 벌어진 2·28 민주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중앙공원을 새롭게 단장하고 서문시장 인근에 기념관도 국비로 들어설 계획이다. 대구나 양산 밀양에 비해 울산의 항일운동 역사는 일천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울산은 광복군 총사령 박상진 의사를 필두로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젊은피와 희생이 어느 지역 못지 않게 강열했던 고장이다. 어디 그 뿐인가. 500여년전 왜의 침략에 가장 먼저 의병을 조직해 분연히 맞선 의혈의 고장도 바로 울산이다. 이쯤 이야기하면 과장된 ‘울뽕’ 아니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도 있지만 지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무지의 결과일 뿐 모두가 사실이다.

 오늘 울산여지도는 바로 그 항일의 함성이 마을 곳곳에 숨어 있는 용머리가 휘돌아가는 땅, 입암을 찾았다. 1749년(영조 25)에 만들어진 학성지(鶴城誌) 면명(面名)조  범서면에 보면 입암의 설명이 뚜렷하다. 마을 입구에 우뚝 선 바위를 ‘입암(立岩)’으로 소개하며 물산이 풍부하고 산세가 안온한 땅으로 적고 있다. 입암, 우리말로 풀면 선바위인 이 마을은 정조 때 입암리와 진목리(眞木里)라 했다가 1895년(고종 32) 이후 평천, 곡연(曲淵)으로 혼재하다 해방 후 입암리로 정리됐다. 평천이나 곡연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입암은 태화강이 휘돌아가는 굴곡이 만들어낸 넓은 평야가 물길을 돌려 풍요를 불러오는 땅으로 이름 났다.  

 입암은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 젊은 스님이 공양미 동냥을 위해 마을을 돌 때 마을의 청년들이 미모의 처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었다. 스님은 젊은 혈기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 처녀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고 처녀의 집 근처에서 며칠을 기다려 드디어 만나게 됐다. 말로만 듣던 처녀의 미모는 실제가 더 황홀경이었고 순간 욕정이 일어 안아보고 싶은 마음을 붙들기 위해 억지로 목탁을 치며 염불을 외었다. 공양미를 원한다고 생각한 처녀가 쌀 한 바가지를 들고 나와 스님의 바랑에 붓는 순간, 욕정을 억누르지 못한 스님은 처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 말았다. 며칠 후 마을에 큰 비가 내렸고 비에 실려 큰 바위가 떠내려와 빨래하던 처녀를 깔아뭉개기 직전이었다. 이를 본 스님이 처녀를 구하려고 강물에 뛰어들었고 결국 두 사람은 물길에 쓸려가 버렸다. 그 후에 바위는 스님과 처녀가 빠진 자리에 우뚝 멈춰 하늘로 솟았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그 바위를 ‘선바위’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폭우가 내리는 여름밤이면 선바위 밑의 백룡담에는 처녀의 원귀가 머리를 산발하고 물가에 앉아서 아주 슬프게 운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 전설같은 이야기는 이 마을 출신 독립운동가 이관술 선생의 어린시절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여름 밤만 되면 선바위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자 입암마을 사람들 모두 겁을 먹었지만 어린 이관술은 겁을 먹지 않고 귀신을 잡겠다며 혼자서 몽둥이를 챙겨들고 앞장섰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전설이다. 바로 그 이관술 선생을 비롯해 입암마을에는 파리 장서 사건에 참여했던 가산(可山) 이우락(李宇洛), 문암(文巖) 손후익(孫厚翼)을 배출했다. 여기에 손후익의 딸 손응교와 이관술의 여동생 순금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여전사들이다. 

 이 가운데 문암 손후익 선생은 단연 돋보인다. 집안 모두가 독립운동에 나섰고 막내 동생인 손학익은 항일 격문을 살포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맹렬하게 하다가 옥살이를 거듭했다. 문암의 차녀 손응교는 심산 김창숙의 며느리가 돼 시아버지와 남편 김찬기 부자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일제의 눈을 피해 군자금을 모았던 문암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 군자금을 모으는 일은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 사이에서도 가장 어려운 독립운동의 하나로 회자됐다. 해방전후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각자였던 심산 김창숙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 언양에서 사고를 당하자 문암은 자신의 집에 숨겨 치료를 도았다. 당시 김창숙은 독립군의 자금모집 총책으로 일제의 1호 지명수배자였지만 문암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고 이를 계기로 문암은 김창숙을 대신해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또다른 독립운동가인 가신 이우락 선생은 파리 장서 사건에 참여해 조선 유림의 기개를 세계에 알렸다. 파리 장서 사건은 국내 유림들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한 사건으로 2회에 걸쳐 일어났는데 가산은 1회와 2회 모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이 운동은 일제가 자행한 명성왕후 시해와 조선 주권의 찬탈 과정을 세계 각국에 폭로하면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한 의거로 알려져 있다. 울산에서 이 운동에 직접 서명한 항일운동가는 가산의 할아버지 뻘인  이규린 옹이다. 가산은 1차 유림사건 때는 물론이고 1926년 일어난 2차 사건 때도 군자금 모금에 앞장서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선바위 전설의 주인공 이관술은 조선공산당 간부였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혀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다. 월북을 거부하고 조선민족의 주체적 국가건설을 주장한 이관술은 친일경찰 노덕술의 악질적인 고문으로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의 주범으로 둔갑했지만 학자들의 노력으로 그 누명이 점차 벗겨지는 중이다. 실제로 억울한 죽음이 대법원의 판결로 드러나기도 했다. 

신출귀몰한 행적과 일경의 포위망을 변장술로 뚫었던 기담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희망이 된 이관술의 아야기가 선바위 백룡담에 숨어 있는 입암마을, 그래서 이 땅은 언제든 찾아가도 신비로운 기운이 휘도는 전설의 땅이다. 김진영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