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울산여지도] 서생, 봄빛이 원녀의 흐느낌으로 깔려 있는 땅
신라 때부터 관리된 수군 거점 벚꽃 만개한 왜성터에 쌓인 한 울산 장정, 원녀들의 피로 맺혀
분홍의 물결이 휩쓴 자리에 푸른 새싹이 봄빛을 토해낸다. 벚꽃이 널브러졌던 봄날 왜성의 천수각 자리에 섰다. 한반도가 생긴 이래 이 땅의 바람과 햇살을 받아 흙을 토해 만개한 벚꽃은 이제 봄의 화신이 됐다. 바로 이 벚꽃은 사연이 많다. 그 벚꽃의 다른 이름이 사쿠라다. 벚나무의 일본 이름인 이 단어는 한 때 변절자를 가리키는 정치적 언어로 둔갑했다. 이 말의 어원은 일본어 ‘사쿠라니쿠’에서 비롯됐다. 사쿠라니쿠는 색깔이 벚꽃과 같이 연분홍색인 말고기를 가리키는 단어로 쇠고기인 줄 알고 샀는데 먹어보니 말고기였다는 괘씸죄가 증표로 붙어 있는 단어다. 변절한 옛 동지를 비꼬는 말로 쓰였기에 사쿠라는 한 때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최근 엔화약세로 일본관광의 열풍이 거세다. 올봄에는 일본 벚꽃 관광상품이 대박이 났다. 지천으로 핀 일본의 사쿠라는 일본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다. 봄날 야스쿠니 경내에 만발한 사쿠라와 태평양 전쟁의 추억은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일부 극우주의자는 혐한이라는 이름으로 깃발을 휘저으며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침을 뱉는다. 희고 순결한 꽃말의 상징성을 제국주의 정치 논리에 포장해 과거 군부의 추억을 소환하는 졸렬한 망상을 그려낸다.
오늘 울산여지도가 찾은 땅은 500년전 왜의 침략 야욕이 뭉툭한 돌덩이로 쌓아올라간 성곽의 잔해가 남은 땅 서생포다. 1592년 한반도를 세 갈래로 나눠 약탈한 왜의 군대가 백두대간 동쪽을 타고 진군하며 점찍은 땅이 서생이다. 그런 연유로 지금의 서생은 서생포왜성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보다 오래고 긴 역사를 가진 땅이다. 서생은 신라시대 생서량군(生西良郡)의 치소가 있었던 지역으로, 지금의 서생, 온산, 온양 지역을 관할하는 동남해안의 거점이었다. 서생이라는 이름과 임진년 왜란의 기억 때문에 서쪽으로 도망가면 살아남는다는 생뚱맞은 이름 풀이로 지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신라 때인 757년 동안군(東安郡)으로 이름을 바꿔 우풍현(虞風縣, 현재의 웅촌면과 양산시 웅상지역)을 영현으로 두었는데 아마도 회야강의 줄기로 이어진 땅 모양 때문에 관할도 그렇게 변경됐던 모양이다. 이후 고려시대에 흥려부에 편입돼 울산과 함께 1,000년 이상의 세월을 담아 왔다.
서생포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왜성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도요토미의 오른팔 가토 기요마사, 가등청정(加藤淸正)이다. 경상도 민요 ‘쾌지나 칭칭나네’가 ‘쾌재라, 청정이 도망간다’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조일전쟁 7년간 울산을 본거지로 조선인 학살·납치 강간을 자행한 원조 사무라이다. 가토가 울산을 지배할 당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다양한 사료를 유추해보면 폭압의 정도가 추잡하고 악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필자가 1990년 온산공단 방도리 앞 목도를 탐방했을 때 이 섬을 지키던 노인이 전해준 이야기도 가토에 대한 구비전승의 잔해였다. 목도, 혹은 춘도로 불리던 방도리 앞의 섬은 조일전쟁 당시 화살촉에 사용되는 대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유명했는데 왜장 가토가 그 섬의 절경에 반해 별장을 지어 수시로 오갔다고 한다. 지금은 온산공단의 여러 공장에 가려 무심히 지나가면 존재조차 가물가물한 섬이 바로 목도이다. 이 섬은 울산 앞바다에서는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던 유인도였지만, 현재는 무인도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기보다는, 살 수 없는 섬이 돼버렸지만, 천혜의 상록수림과 동백이 제대로 자라 천연기념물로 관리되고 있다.
물고기의 눈처럼 생겨 ‘목도(目島)’, 과거 이 섬에 살던 주민들이 화살대를 심어놓아 ‘죽도(竹島)’, 남해안의 동백을 옮겨 심어놓아 ‘동백섬’ 혹은 동백나무 중 3월에서 4월에 꽃을 피우는 춘백(春栢)이 많아 ‘춘도(椿島)’라고 불리는 이 섬은 이름만큼 사연도 많다. 동백 외에도 후박나무·사철나무·벚나무·팽나무·담쟁이덩굴 등 4,500평에 푸른 상록수림이 빽빽이 자라고 있는 섬이다.
온산읍지에는 이 섬에 이런 전설이 전해진다. 마음씨 착한 청년이 마을 어부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나가 그물을 올렸는데 인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부들이 큰 횡재를 했다며 마을로 끌고 가려 했지만 이 청년이 몰래 인어를 풀어줬다. 물론 인어를 풀어준 청년에게 돌아온 것은 어부들의 심한 매질이었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됐다. 이를 알게 된 용왕은 인어를 청년과 혼인시키고 섬 하나를 만들어 선물했는데 바로 이 섬이 목도다. 그런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진 이 섬이 왜장 가토의 야욕으로 비애의 섬으로 둔갑한다. 왜란 당시 이 섬에서는 왜장 가토가 끌고 온 처자들을 자신의 노리개로 삼았고 그 원혼이 동백으로 피어나 봄이 시작되면 일제히 목을 잘라 붉은 주단을 깔았다는 이야기다.
서생포왜성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593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축성명령이다. 같은 해 5월 한양에서 퇴각한 가토는 서생포를 근거지로 성을 쌓았다. 조일전쟁 직후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쫓긴 왜군은 축성과 양식 확보의 계획을 세웠다. 이는 한강 이남의 4도 기점으로 대륙의 통로를 확보하려는 히데요시의 계략이었다. 그 전략적 거점이 바로 서생포 왜성이다. 가토는 왜성을 쌓으며 고려와 조선조 때 왜적의 방어선이던 수군만호를 허물어 그 돌을 왜성축조에 사용했다. 귀중한 우리의 문화자산이 왜장의 손에 헐리고 그 돌이 왜성으로 변한 셈이다. 그뿐이 아니다. 가토가 왜성축조에 동원한 울산의 장정들은 1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축조공사를 마쳐야 하는 지옥공사 일정으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고 축성과정에서 셀 수없는 많은 장정들이 황천길에 올랐다. 돌덩이에 깔린 이 땅의 원혼은 소리 한 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했고 살아남은 자는 왜가 퇴각할 때 함께 끌려가 구마모토의 왜성을 쌓는 노역에 동원됐다. 그 흔적이 왜의 땅에 ‘울산마찌’라는 이름으로 얼마 전까지 남아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사실이다. 김진영 논설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