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1조원대 ESS 건설 프로젝트 ‘갑질’ 논란

[뉴스&쟁점] 1년9개월간 공청회만 15차례 착공 시기 늦어져 공사 서둘러 이유없이 설계변경 접수 거부 사업자에 일방적으로 부담 떠넘겨 신의성실 원칙 위반 피소 위기 한전 "법정 공사기간은 확보 추가 연장·설계변경 협의 중"

2024-08-26     조혜정 기자
한국전력공사가 국가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에 대비한 대규모 ESS(에너지저장장치)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국 5개 공사현장의 시공업체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사진은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한 공사현장의 모습. 이수화 기자

국가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에 대비해 약 1조원대 ESS(에너지저장장치)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한국전력이 입찰에 참여한 대다수 사업자들과 갈등을 빚으며 '갑질'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공청회 기간이 무려 2년 가까이 이어진 탓에 공사기간이 확 줄었지만, 발주처인 한전이 법적 의무는 외면한 채 공사를 서두르는 과정에서 대다수 사업자들이 적게는 수십억원 많게는 백억원대 적자를 봤다며 법적 소송을 검토 중이다.

26일 본지 취재에 따르면 한전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대비한 전력계통 안정화를 꾀하기 위해 경남 밀양(부북)과 전북 남원(신남원), 경북 영천, 충남 예산, 경남 함양 등 전국 5개 변전소에 원자력발전소 1기와 맞먹는 970㎿(메가와트) 규모의 '계통안정화 ESS 건설 사업'을 추진해왔다.

이 사업은 정부가 지난 2020년 12월 발표한 '제9차 전력수급계획'의 연장선상에서 한전이 발주한 이른바 국가 에너지정책 프로젝트다. 오는 2034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발전비중 목표를 전체의 25.8%(2023년 기준 9.64%)까지 끌어올리는 게 제9차 전력수급계획의 골자다. 이 경우 신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의 90%를 풍력과 태양광으로 채우게 되는데, 출력 변동성이 워낙 크다 보니 안정적인 전력망 구축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이 때 필요한 장치가 바로 ESS 즉, 생산된 전기를 배터리에 잘 저장해뒀다가 전력이 필요할 때 송전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다.
 

한국전력공사가 국가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에 대비한 대규모 ESS(에너지저장장치)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국 5개 공사현장의 시공업체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사진은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한 공사현장의 모습. 이수화 기자

문제는 ESS 건설의 첫 단추 격인 한전-사업자간 공청회 단계에서 이미 예고됐다. 사업자 제보를 종합하면 한전은 공청회 당시 입찰계약은 '종합낙찰제'로 업무수행 방식은 'EPC'로 혼용해 진행하면서부터 혼란이 시작됐다.

종합낙찰제는 기재부 장관이 지정·고시하는 물품의 제조·구매 계약시 필요하다고 인정한 경우 입찰 가격과 품질 등을 종합 참작해 낙찰자를 결정하는 제도로, 자재 품질과 경제성을 확보하기에 유리하다. 단, 토목건설 시공은 해당되지 않아 분리발주가 이뤄져야 한다. 또 EPC는 설계·조달·건설 각 단계를 통합관리하는 방식으로 효율성과 안정성은 극대화하고 위험은 분산해 대규모 프로젝트에 적합하지만, 국가계약법엔 EPC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어 민간 사업에 한해 적용된다. 이를 두고 이번 계통안정화 ESS 건설 사업의 토건 시공을 맡은 복수의 현장 관계자들은 "관급공사를 수차례 해오면서 계약방식 따로 업무수행방식 따로 진행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더군다나 물품 구매에 맞는 종합낙찰제를 시공에 적용하고, 민간사업에나 적합한 EPC를 국가 에너지정책 사업 방식으로 수행하는게 법적인 잣대를 떠나 과연 상식적인지 아닌지부터 묻고 싶다"고 따졌다.

촉박해도 너무 촉박한 공사기간도 문제의 핵심이다.

한전이 이번 ESS 건설 프로젝트에 시동을 건 시기는 제9차 전력수급기본계획 발표가 이뤄진 직후인 2021년 1월이다. 실제 한전은 이 때부터 이듬해 10월까지 1년 9개월간 총 15차례에 걸쳐 업무설정, 공사기간 산정, 자재낙찰자 선정방식, 시공주체 변경 등을 놓고 사업자들과 공청회를 가졌다. 원래 한전 계획대로라면 2023년 12월 준공을 목표로 2022년 4월에는 전국 5개 현장에서 착공이 이뤄졌어야 했지만 일정이 지연됐다. 다시말해 공기가 촉박해졌다는 의미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한전은 발주와 계약이 임박한 시점에서 당초 자신이 맡기로 했던 건축공사 시공주체를 EPC 사업자로 바꿨고, 계약은 2022년 12월~2023년 2월이 돼서야 체결됐다. 당시 5개 현장에선 △밀양 부북-효성·금양그린파워 △신남원-HD현대일렉트릭 △영천-LG전자 △예산-유니테스트 △함양-EN테크놀로지 등이 대표 EPC사로 참여했는데, 계약 자체가 늦춰지면서 덩달아 착공시점도 지연됐다.

대부분 현장의 대표 사업자들은 "발주처의 요청이나 현장 여건 등으로 설계변경이 필요한 경우가 태반인데도 한전이 문서 접수를 거부하거나 실정보고에 대한 회신을 해주지 않고 있다"면서 "건설 관련 법령이나 국가계약법을 보면 공사기간 적정성 심의가 의무화돼 있을 뿐 아니라, 특별한 이유 없이 설계변경을 거부해 계약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부담을 떠넘기는 행위를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도 공기업인 한전은 이를 어긴 채 신의성실의 원칙을 버젓이 위반하고 있어 소송을 준비 중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계약금액을 변경해야 하는데 한전이 설계변경을 인정해주지 않는 바람에 사업자 투입비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면서 "아직 정산받지 못한 기성금도 많아 하청업체에 공사비 정산을 못해주고 있는 형편"이라고 호소했다.

이에 대해 한전은 "해당 사업은 현재 준공처리가 진행 중으로 공사기간은 미확정"이라며 "사업자와 협의를 통해 법정 공사기간은 확보했고, 그 외 공사기간 추가 연장과 설계변경의 경우 협의 중에 있다"고 해명했다. 조혜정 기자 jhj74@ius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