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울산여지도-59] 포경, 1만년의 고래사냥 증좌가 남은 곳
인류최초 고래사냥 역사 살아 있는 땅 고래부터 공업입국 역사까지 품은 지역 잊혀진 울산의 뿌리 제대로 찾을 기회
지난 주말 장생포가 들썩거렸다. 고래축제다. 울산의 랜드마크가 된 고래는 한반도 인류사의 뿌리와 연결된다. 울산이 선사 이전의 시대부터 생태적 보고가 됐다는 증거는 여럿이다. 지질학에서는 울산의 지표 아래와 지층에 드러나는 증거를 토대로 백악기 시절부터 울산의 생태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 첫 증거가 공룡이다.
공룡 이름에 울산의 학명이 들어간 노바페스 울산엔시스는 울산의 공룡문화를 대표하는 증거다. 노바페스 울산엔시스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울산에서 새롭게 발견된 발자국’이라는 의미다.
이 공룡은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발견됐고 전 세계에서 가장 온전한 코리스토데라 발자국 화석이다. 지난 202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국제학술지에 발표하면서 학명에 울산 지명이 들어갔다.
놀랍게도 이런 이야기는 울산 공룡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혁신도시가 들어선 울산 중구 유곡동에는 전기 백악기 시대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다. 전기 백악기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1억년 전이다. 까마득한 시절 이 땅은 공룡의 천국이었다. 여기서 발견된 발자국은 육식공룡 마니랍토라의 발자국 3개와 초식공룡 고성룡 발자국 77개 등 80여개에 이른다. 특이하게도 이 곳의 공룡 발자국은 일정한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가는 듯한 모양이어서 마니랍토라 한 마리가 고성룡 아홉 마리를 뒤쫓는 도중에 생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공룡발자국 화석은 보존상태가 양호해 지질시대 울산 지역에 대한 자연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사실이다.
유곡은 물론 멀리 대곡천 반구대암각화부터 범서 국수봉을 거쳐 태화의 줄기까지 울산의 곳곳은 공룡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많은 공룡이 사라진 뒤 이 땅의 주인은 바다에서 고래가, 육상은 북방의 동물을 따라 남하한 인류의 한 무리가 차지 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울산의 첫 정착인이다.
우리의 선인들이 아득한 석기시대부터 육로 또는 해로로 이곳에 들어와 정착사회를 이뤄 살았던 이유는 바로 이런 엄청난 지구의 역사를 품고 있다. 서생 신암, 장현 황방산의 신석기 유적과 석검이 출토된 화봉, 그리고 지석묘가 있는 언양 서부리의 청동기 터전 등 열거하기 벅찬 흔적이 수두룩이다. 이 가운데 사연의 물길에 닿은 대곡천의 암각화는 고래와 거북, 사슴과 표범에 멧돼지까지 각종 동물그림이 백과사전처럼 펼쳐져 있다. 여기에 인류의 원시적 신호를 새긴 두동 천전리의 각석에는 원과 삼각형, 마름모의 기하학적 문양이 우주를 향해 끊임없이 중얼거린 주문의 파장이 별자리처럼 펼쳐져 있다.
오늘 울산여지도가 밞은 땅 장생포는 그런 문화적 유전인자가 적나라한 인류의 욕망으로 드러난 땅이다.
장생포는 지리적으로 울산광역시 남구의 동북부에 위치했다. 동쪽과 남쪽은 울산만에 닿아 있고 매암동, 용잠동 및 고사동과 이웃한다. 과거 동해남부선과 울산항선의 종착지로, 장생포역과 울산항역이 있었고, 동해안까지 뻗은 장생포로(長生浦路)가 31번국도 및 부두로(埠頭路)와 연결된다.
장생포는 고래를 빼고 이야기가 안되는 곳이다. 구한말인 지난 1891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일본으로 가다 장생포 앞바다에서 큰 고래 떼를 발견한 것이 근대 포경의 역사라 기록되고 있지만 장생포와 고래의 인연은 지명에서 보듯 훨씬 오래됐다.
지리적으로 보면 7,000년 전, 이 땅의 사람들이 반구대에 남긴 고래 암각화는 고래생태 백과사전이거나 고래 숭배의 제단이었을 법하다. 그보다 더 상상력을 불어넣으면 하늘과 맞닿아 풍요와 안전을 발원하던 제의의 상징적 장소였을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그 반구대 물길이 동해와 맞닿는 지점에 장생포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상징이 현실이 된 고래가 바로 귀신고래다. 귀신고래(Korea Gray Whale). 이름에 대한민국을 뜻하는 ‘코리아’가 들어 있는 가슴벅찬 고래다. 길이가 무려 20m, 몸무게는 14~35t에 달한다. 대형 잠수함 같은 거구가 동해바다를 뚫고 치솟는 장관은 압권이다. 바로 그 바다, 귀신고래가 하늘로 웅비하던 곳이 고래바다다.
고래바다라는 과거 경해(鯨海)로 불렸다. 하지만 러시아를 선두로 경해를 탐내던 열강들은 한세기에 걸쳐 무자비한 귀신고래 사냥에 나섰다. 결과는 참혹했다. 기록에 따르면 1912년 한해 동안 귀신고래는 무려 188마리가 작살과 포탄에 맞아 육지로 끌려왔다. 남획의 결과는 씨를 말렸고, 50년 전 마지막으로 두 마리의 귀신고래를 작살로 찔러죽인 것이 인간에 의한 마지막 도륙이었다. 씨가 마른 귀신고래는 더 이상 이 바다를 찾지 않았다.
작살을 거두고 흠모의 눈빛으로 망망대해를 쫓는 인간에게 귀신고래는 더 이상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고도성장으로 고래고기 살점을 더 이상 탐내지 않아도 먹고 살만하던 시절, 제6진양호가 마지막 포경 허가를 받아 동해를 달리던 1977년, 귀신고래 두 마리가 동해바다 어디쯤 포효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미 전설이 된 이야기다.
귀신고래는 사라졌지만 극경의 울산 장생포는 지금 디지털로 새로운 고래문화를 펼치고 있다. 고래 생태의 세계적인 석학인 프랑스 호비노 교수가 울산을 세계 고래사냥의 시원으로 도장을 찍었다. 반구대암각화가 뒷배였다. 노르웨이가 포경의 원조라고 외치고 있는 사이에 호비노 교수는 ‘포경의 역사’ 첫 장에 노르웨이가 아닌 반구대암각화의 고래를 찍었다. 그리곤 "세계 포경역사의 시발점을 말해주는 것은 반구대암각화다"고 밝혔다. 1만년 전 선사인이 왜 장생포와 반구천을 오가며 고래사냥을 했을까.
울산의 오랜 과거사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공룡과 고래, 그리고 석탈해로 시작되는 북방의 철기 문화가 바로 울산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다. 그래서 장생포의 오늘은 고래없는 고래특구가 아니라 생생한 인류사의 뿌리를 되새김하는 문화의 보물창고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