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_울산, 소설이 되다Ⅰ] 슬픈 밤, 새벽달(6)

2025-01-16     강정원 기자
배호 그림

"다음 노래는 서덕출 시, 윤극영 곡 봄편지로 김영복 양이 독창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바짝 긴장하여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연못 가에 새로 핀

버들 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대한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 옵니다


연주자가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나는 어쩐지 부끄럽고 민망하여 가슴만 졸이고 있었는데 이백여 명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강당 천장을 뚫을 듯했다.

김영복 양이 무대로 내려가고 작자 소개를 할 차례였다. 사회자인 방정환 선생이 헛기침하자 장내는 신호를 기다리는 병사들처럼 주목했다.

"이 애상적인 동요를 지은 서덕출 시인은 경남 울산부 복산동에 사는 사람으로 두 다리를 못 쓰는 불구자입니다. 세상에 난 후 마당에도 제 발로 나오지를 못하고 항상 방 속에서만 쓸쓸히 사는 가련한 소년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으로 자연과 이웃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개인의 아픔과 시대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장한 소년입니다. 얼마 전 서덕출 시인이 제게 보내온 편지를 소개하겠습니다. 흠흠, 방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서울의 봄빛은 어떠하십니까? 이곳 울산의 봄빛은……"

편지 시작부터 부인석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나더니 편지가 끝나갈 무렵엔 점점 더 울음소리가 커졌다. 잠시 틈을 둔 방정환 선생이 다음 동요를 넘어가려는데 남자 한 분이 나왔다.

"그렇듯 좋은 동요를 지어낸 귀한 시인이 그렇듯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다니 그냥 돌아가서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겠습니다. 시인의 쓸쓸한 마음을 위안하고 좋은 동요를 낳아 준 것에 감사하는 한편 앞날을 축복하는 간절한 정을 선물로 보내십시다."

남자 어른의 말에 모든 사람이 찬성하였고 발 빠른 사람 몇이 모자나 보자기를 들고 한 바퀴 돌았다. 잠깐만에 걷힌 돈은 무려 3원 21전이나 되었는데, 선물 선정과 전달은 색동회에 맡긴다는 발표와 함께 방정환 선생에게 넘겨졌다.

그 순간 내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지고 빙글빙글 돌았다. 바늘방석 같던 의자에서 벗어난 내 몸이 둥싯거리더니 저만치, 저 멀리 달아났고 잠시 뒤 우리 집 대문으로 쑥 들어섰다. 무슨 축지법을 쓰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그랬다. 마당의 초목도 모두 비에 젖어 있었다.

오동나무 아래 짚방석에 앉아 있는데 열려 있는 대문으로 석중이 쑥 들어섰다. 바로 뒤따르는 방정환 선생의 얼굴을 보고 나는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내 몸은 바꿔 있었다.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고 등이 굽었다. 나무 둥치를 붙들고 용을 써봤지만 일어설 수 없었다. 다리가 펴지지 않았다. 나들이옷 입은 남자들과 부인들, 교복 입은 학생들, 어린아이들이 태화강 둑을 넘는 물처럼 밀려왔다. 족히 이백 명은 될 것 같았다. 맨 앞에 선 방정환 선생이 선물 꾸러미를 주며 풀어보라 했다. 처음엔 미적거렸으나 모인 사람들이 함께 채근하는 바람에 나는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었다. 만년필이었다. 마츠시게 잡화점에서 보았던 만년필, 단박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두고두고 생각났던 그 만년필이었다.

"결코 낙망하여서는 안 됩니다. 슬퍼만 하여서는 안 됩니다."

"이 만년필로 봄편지같이 좋은 노래를 자꾸 지어주세요."

"아무쪼록 웃어 주십시오. 웃으면서 살아 주십시오. 웃음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이 만년필로 적어 주십시오."

너나없이 나서서 몸을 낮추거나 내 손을 잡으며 한마디씩 했다. 모양 빠지게 한줄기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

"아, 아, 이 귀한 만년필을……"

"덕출 씨, 덕출 씨." (계속)


 

# 작가 소개 : 강 미 소설가

         강 미 소설가

울산에서 국어교사로 지내며 아이들의 삶을 공유하고 싶어 청소년 소설을 썼다. 청소년 소설 『사막을 지나는 시간』 『안녕, 바람』 」밤바다 건너기』 『겨울, 블로그』 『길 위의 책』 『키 다른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논픽션 『동네책방 분투기』 『조강의 노래』를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