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_울산, 소설이 되다Ⅰ] 슬픈 밤, 새벽달(7)

2025-01-19     강정원 기자
배호 그림

나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석중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

"어디긴요, 덕출 씨 방이지요. 잠꼬대하시길래…… 아, 이거 좋은 꿈을 제가 훼방 놓았습니까? 하늘이 놀라운 시구를 주셨나요? 아니면 아리따운 여성이라도 만났어요?"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꿈, 꿈이었구나. 그래도 좋았다. 걸어봤고, 고운 노래를 들었고, 만년필을 받았으니 기쁘고 행복했다. 꼭 그만큼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간밤엔 놀라셨지요? 미안했습니다." 

"아이구, 무슨 말씀을요. 나들이가 과했나 싶어 반성했습니다.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잠은 깊게 주무시는 듯했습니다."

"예. 잠포록하게 잘 잤습니다. 예쁜 꿈도 꾸었고요. ……비가 오래도록 내리는가 봅니다." 

그 대답은 고송이 했다. 우리 말소리에 그도 잠을 깬 모양이었다. 

"간밤부터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여름 한가운데인데 장맛비같이 말이에요."

고송이 누운 채로 방문을 열었다. 그 틈으로 잎사귀를 접은 채로 아래로 처진 자귀나무가 보이고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우리는 앉거나 누운 채로 다문다문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구에서 새벽차를 탔다는 윤복진이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복진은 점점 더 심해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걸어들어왔다. 어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여비를 마련한다고 이제야 올 수 있었다고 했다. 함께 대구사범을 다니고 있는 고송이 누구보다도 그 어려움에 공감했고 석중은 처음 뵙는다며 환하게 웃었다. 나와 동갑인 복진은 석중에게 깍듯했고 편지 읽는 기쁨이 컸다며 나에게도 특별한 인사를 건넸다. 우리 <굴렁쇠> 회보 만드는 방식이 그랬다. 각자 지은 동요와 글동무에게 알릴 일을 적어 우편으로 전하는데 서울의 석중이 한 꼭지를 채워 진주의 소용수에게 보내면 그가 자기 작품과 편지를 보태 마산의 이원수에게, 이원수는 언양의 신고송에게 보내는 식이다. 나는 고송에게 받은 원고에다 내 글을 보태 대구로 보낸다. 그렇게 전국을 돌며 쌓인 작품들은 다시 서울의 석중에게 가니, 나이는 어려도 석중이 굴렁쇠의 중심이었다.

"어째 이원수 씨가 보이지 않는군요." 복진의 말에 석중이 안타까움을 실어 말했다.

"제가 마산에서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울산으로 가자고 했지요. 함께 있는 동안에도 통 말이 없더니 작은 목소리로 못 간다고 하는 거예요. 기차 삯이 없거니와 학생 독서회 사건으로 숨어 지낸다니 더 권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쿠, 고생이 많으시군요. 그래도 곳곳에서 그렇게 애쓰시는 분들, 우리 조선의 저력 아니겠습니까."

복진의 말을 시작으로 전국대회에 참가한 지역 대표처럼 서울, 대구, 언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운동을 전했다. 갈수록 목소리가 낮아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바깥 사정을 잘 모르는 나는 민우회 활동과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밤, 비 오는 밤. 

연잎에 빗방울이 구르고 비바람에 흔들리는 오동나무 가지와 손바닥 같은 잎사귀, 빗소리에 묻히지 않고 나 여기 있소 울어대는 귀뚜라미, 비 무게에 고개를 꺾은 배롱나무, 꼿꼿이 선 채로 비를 감당하는 백일홍…… 그립디그리웠던 동무들이 거미줄 토해내듯 쏟아낸 이야기들도 어느새 잦아졌다. 나는 말없이 마당만 바라보고 있는 벗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았다. 내일이면 흩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흐르는 시간을 저 오동나무 기둥에 친친 감아놓고 싶었다. 벗들도 아쉬웠던 것일까, 고송이 혼자 손뼉을 두 번 치더니 말했다.

"아,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전국에서 힘들게 모였는데, 기념 시 한 수 어떻습니까?"

뜬금없었으나 태화강 윤슬같이 멋진 말이었다. 너나없이 같은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누가 하냐, 함께 쓰자, 그러면 돌아가며 한 줄씩 만드냐,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계속)

 

# 작가 소개 : 강 미 소설가

         강 미 소설가

울산에서 국어교사로 지내며 아이들의 삶을 공유하고 싶어 청소년 소설을 썼다. 청소년 소설 『사막을 지나는 시간』 『안녕, 바람』 」밤바다 건너기』 『겨울, 블로그』 『길 위의 책』 『키 다른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논픽션 『동네책방 분투기』 『조강의 노래』를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