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태화강의 수운을 생각하며

산 많고 평야 적어 물길 따라 물자 이동 태화강, 조선시대 조세 품목 운송 뱃길 과거 흑백사진 보며 그 시절 돛배 조우

2025-02-10     이철영 문화유산 연구가
일제강점기 울산왜성 아래 태화강변의 돛배와 거룻배(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자제공

 

이철영 문화유산 연구가

 때로는 빛바랜 한 장의 사진이 평소 무관심했던 건 사실이나 궁금했던 지난 역사를 알려 줄 때가 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울산은 도심을 흐르는 태화강이 되살아나면서 국내 최고의 생태도시가 됐고 시민들에게 휴식과 문화활동의 공간을 제공함은 물론 각지의 관광객을 불러오는 역할도 한다.

 태화강이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는 아주 먼 과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생명 유지를 위한 음수와 식량생산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제공하고 문화를 키워 전하는 기능 등 실로 다양했다. 강의 또 다른 역할 중 하나가 배를 띄워 사람이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수운(水運)이었다. 

 조선시대 태화강의 수운은 어떤 형태로 이뤄졌을까. 태화강이 그다지 길지 않은 편이므로 아무래도 낙동강처럼 강의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는 것보단 일부 구간을 바다로 나아가는 해운의 출발지로 활용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세금을 거둬 보관했다가 중앙 정부와 지역 소재의 영진(營鎭) 등으로 운송하는 것이었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은 우리나라는 지형상 육로보다 수로를 이용해 물자를 이동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물자를 옮기는 데 있어서 말이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하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수레가 다니기 불편해 온 나라의 상인들은 모두 말에다 화물을 싣는다. 그러나 길이 멀면 노자는 많이 허비되면서 소득은 적다. 따라서 배에 물자를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이익보다 못하다"고 했다.

 각 고을에서 부담하는 조세와 재정 전반을 상세하게 기록한 정조 18년(1794)의『부역실총』을 보면 각 항목별로 운반거리에 따른 물류비가 잡비의 명목으로 별도 책정돼 있다. 

 실제로 경상도의 많은 고을들은 가급적 중앙으로 보내는 상납은 줄이고 지방의 타 관청에 납부하는 하납이나 재원을 예비비로 지역에 보관해 두는 저치분(儲置分)을 늘렸으며, 상납도 부피가 큰 세곡보다는 포목이나 동전을 위주로 했다.

 『부역실총』에 따르면 조선후기 울산도호부가 징수한 세곡 중 3,000여석의 쌀이 동래부 관할 부산창(釜山倉)으로 하납됐고, 수송에 드는 뱃삯 및 잡비는 약 204석과 126냥의 동전이 책정됐다.

 이들 세곡은 임란이 끝난 후인 광해군 1년(1609) 일본(대마도)과 맺은 기유약조에 따라 재개된 공무역의 결재 수단으로 사용됐다. 처음에는 그들이 가져온 물품에 대해 면포(公木)로 지급하다가 대마도의 요청에 따라 일부를 쌀로 바꿔 줬는데 이를 공작미(公木作米의 줄임말)라 불렀다. 

 한해 대마도에 지급할 공작미는 약 1만3,000석이며 경상도의 17개 고을이 담당했는데 울산도호부가 납부한 쌀 중 1,830석이 공작미 명목이었고 이는 동래부 다음으로 많은 양이었다.

 정조 10년(1786) 간행된 『울산부읍지』에는 3월에 전세(田稅)로만 2,000여석을 거둬 4월에 태화강나루(太和江頭)에서 배에 실어 부산창으로 해납(海納)한다고 적었다.

 조선시대 각 고을의 강변에 뒀던 나루터는 개념상 한강의 삼전도와 같이 단순히 강을 건너기 위한 도(渡)를 비롯해 타지를 오가는 배가 정박하는 진(津), 규모가 큰 나루인 포(浦)로 구분했지만 지방에서는 혼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헌상 조선전기 태화강의 나루터는 태화루 아래에 설치한 태화진과 하류에 설치한 주진(注津)이 있었고, 후기에는 동천 합류지점에 내황진을 증설했다.

 나루터에는 돛이 없는 작은 거룻배를 둬 강을 건널 수 있게 했고, 때때로 강과 바다를 오가며 세곡과 짐을 운반하는 조운선도 드나들었다. 이들 조운선은 항행구역에 의해 강배(강선)와 바다 배(해선)로 나뉘는데 배의 구조와 모양이 달랐다. 수심이 낮고 곳곳에 여울이 있는 강을 다니는 강배는 바닥이 평평하고 깊이도 얕아 많은 짐을 실을 수 없었기에 비교적 크기가 작은 외돛배였다. 반면 바다 배는 깊은 해양을 항해하므로 큰 배가 많았고 수시로 풍향이 바뀌는 해풍을 잘 이용하기 위해 쌍돛대를 달았다. 한강변의 명승지를 그린 겸재의『경교명승첩』에는 당시 한강에서 운행한 거룻배와 강선, 해선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다.

 일제강점기 태화강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거룻배 1척이 태화강을 건너 열심히 노를 저어오고 있고, 울산왜성 쪽에는 돛대 2~3개를 단 해선이 강변에 정박해 있다. <사진 그림 참조>

 아마도 이곳이 기록에 나오는 태화강의 주진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이유는 조선후기 태화강의 수심과 퇴적으로 울산교 부근에 형성된 중도를 고려 할 때 해선이 그 이상 올라가기 어려웠다. 이처럼 태화강의 나루는 관용 조운선만이 아니라 민간 상선도 수시로 드나들며 울산과 주변 도시의 재화를 유통시켰을 것이다. 

 이제 태화강에서 더 이상 유행가 가사처럼 순풍에 돛을 달고 황혼 바람에 떠나가는 배를 볼 순 없지만 역사의 창을 통해 태화강물에 흘러간 그 시절의 돛배를 만날 수 있다. 이철영 문화유산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