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울산여지도] 인보, 백운산 정기 품은 땅

태화강 발원지 탑골샘과 분수령 옛길의 요충지로 잉파역이 위치 청동기부터 일제 흔적까지 남아

2025-10-19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울산은 대표적인 서고동저(西高東低)의 독특한 지세를 가진 땅이다. 오늘 울산여지도가 밟아보는 울산 서쪽 백운산(白雲山·910m)은 서고동저의 지형을 그대로 이어받아 대곡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울산 젖줄의 근원이다. 대곡은 태화의 상층부로 백운의 물줄기는 태화의 뿌리다. 백운산은 신라 시대 열박산(咽薄山)으로 불렸다. 열박은 ‘밝고 광명한 산’이라는 뜻을 품었다. 서기 612년 김유신이 열여덟에 홀로 보검을 쥐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기도해 입지(立志)를 굳힌 기도굴이 이 산에 있다. 신라 화랑의 성지가 열박인 이유다. 그런 연고로 백운산은 신라 화랑의 본산이라 부른다. 

 울산의 젖줄 태화 100리의 뿌리는 해발 550m 높이에 위치한 백운산의 탑골샘이다. 탑골샘에서 시작된 태화강은 거리상 47.54㎞의 유장한 여정을 시작하며 6,500만년의 세월을 이어가고 있다. 탑골의 샘물이 동해로 뻗어나가기 전, 힘을 모아 물길을 응축한 복안저수지는 미호리 벌판 ‘가메들’에 생명수를 공급하는 성수(聖水)다.

 백운산은 풍수의 바탕이 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진수를 보여주는 길지다.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산자분수령은 백운의 허리, 탑골에 서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백운산 북쪽 10분 거리의 삼강봉은 이름처럼 3개의 강줄기의 뿌리다. 이 봉우리에서 모인 빗방울이 태화와 형산, 낙동으로 각기 다른 운명의 물줄기를 만들어 간다. 백운산의 물은 형산강과 낙동강에 일부를 넘겨주고 나머지는 태화 100리길에 몸을 싣는다.

 백운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에 온몸을 적신 흙은 아미산과 천마산을 거쳐 미호리 들판을 풍요로운 땅으로 만들었다. 천마산과 아미산 사이의 협곡을 빠져나온 물이 토사를 날라 만들어낸 둘도 없는 부채꼴 모양의 선상지(扇狀地)가 바로 미호리 들판이다. 말 그대로 곡창이다. 미호리(嵋湖里)라는 이름은 ‘아미산’의 ‘미’자와 가매달 계곡의 호소(湖沼)에서 ‘호’자를 땄다. 

 여기는 사방이 넓은 평야지대이기에 예로부터 탐내는 이가 많았다. 그런 까닭에 역참이 발달해 신라 초기부터 교통의 요충지이자 전략적 주요 거점이었다. 오래된 기록은 별로 남지 않았지만 조선조 때 기록은 이 일대에 잉파역이 존재했고 역참의 기능이 활발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시대 도로는 지금과 같이 발달되지 못했기에 교통 및 통신 수단은 봉수(烽燧)와 파발(擺撥)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이용했다. 육상에서의 도로 기능은 역원(驛院), 혹은 역참(驛站)이 맡았다. 역참은 공문서 전달, 물품 운송, 그리고 관원의 왕래와 숙박을 맡은 국가 기관이었다.

 옛날 우역(郵驛)제도 또는 역참(驛站)제도를 살펴보면 고려 시대에는 전국의 관도(官道)를 22도(道)로 나눠서 525개소의 역을 뒀다. 울산지방은 경상도 김해 덕산역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로 김해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던 ‘금주도(金州道)’에 해당한다. 이 도로상에 있던 울산지역의 우역으로는 굴화의 굴화역(屈火驛), 웅촌면 곡천의 간곡역(肝谷驛), 삼남면 교동의 덕천역(德川驛), 두서면 인보의 인보역(仍巴驛)이 있었는데 두서면은 당시 경주권역에 속해 있었다. 인보는 너부 또는 잉파로도 불렸다. 

 인보리는 조선 시대까지 경주부 남면에 속해 있었다. 남면은 1777년(정조1년)에 내남면과 외남면으로 나눠지고, 1906년(광무10년)에 외남면은 울산군에 이속되면서 두북면(斗北面)으로 명칭을 고쳐 부르게 된다. 1908년경에 두북면 중심부를 지나는 언양-경주 간 관로(官路)를 따라 동쪽은 두동면(斗東面), 서쪽은 두서면(斗西面)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인보는 1469년 간행된 <경상도속찬지리지> 언양현 참역(站驛) 조에 너부로 기록돼 있다. 1906년 울산군에 이속된 후 1911년에는 인보(仁甫)·전읍(川邑)·서하(西河) 3개동으로 갈라졌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에 인보동(仁甫洞)에 삼정동(三井洞) 일부를 합쳐 인보리로 정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에 속하는 법정리인 인보는 역사 시대에서 주로 이 역원제와 관련된 교통의 요지로 언급되는 곳이다. 인보리 마을 이름 ‘인보’는 본디 명칭인 ‘너부’의 차자 표기다. 조선 시대에 언양과 경주를 왕래하던 역로 중 하나였던 잉포역(너부역, 仍甫驛)이 이곳에 있었다. 언양 북쪽에 잉파역, 남쪽에는 덕천, 동쪽에 굴화역이 울산 서부권의 역참이었다.

 잉파역(혹은 잉포역)에 대한 기록은 고려   시대 문헌에도 나타난다. 일부 학자들은 신라 시대 <삼국사기> 권37 잡지6에 나오는 ‘태문역(兌門驛)’이 바로 이 잉파역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인보리의 지리적 형상은 동서 횡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동편에 취락지구가 형성돼 있다. 이 일대 마을은 인보대로를 기준으로 동쪽의 노동(路東)과 서쪽의 노서(路西) 로 부르는 자연부락이 있다.

 인보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오래됐다. 이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인보리 산37-7번지에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군 2기가 발견된 것을 비롯 유구 여럿이 나왔다. 고인돌 발견은 남쪽에서 특별한 것으로 취락인구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언양과 경주를 연결하는 반구대로 확장공사 당시 대규모 발굴조사에서 청동기 시대 유구와 함께 삼국 시대 유구 14기가 확인된 것은 물론 작물 창고용 시설이 대거 나온 점은 연구대상이다. 

 인보는 천주의 땅으로도 유명하다. 최근 울주군이 조성한 천주교 순례길의 중요한 시작점이 바로 이 땅이다. 울주군이 조성한 순례길 3개 코스 중 1코스는 신유박해(1801년) 이후 박해를 피해 형성된 교우촌을 둘러보는 길로, 인보성당에서 시작해 하선필공소, 상선필공소, 탑곡공소에 이르는 총 8.1㎞ 구간이다. 선필(善弼) 마을은 옛 성현이 살았다 해 ‘선한 마을’이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마지막 팁 하나, 인보는 역참의 핵심지이지만 조선 철강왕 이의립의 고향이기도 하다. 인보 동쪽 전읍이 이의립의 땅으로 그는 바로 옆 한반도 선사문화 1번지인 대곡천의 정기를 타고난 인물이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