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영의 경주남산 답사기] 거대한 용이 누워있는 형상의 ‘와룡동천’
[21] 와룡골과 와룡사 경주 최부자댁 별당으로 지어진 와룡암 법당 들어서며 가문 평안 기원 도량으로 천룡사서 옮겨온 와룡사 석종형 부도 스승에 대한 예경·불심 담긴 문화유산
경주 남산의 최고봉인 고위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천룡골을 지나 와룡골(臥龍谷)과 만나고, 다시 틈수골과 합류해 기린내천을 거쳐 형산강으로 흘러든다.
와룡골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고위산 산정에서 내려다본 계곡의 형세에서 비롯됐다. 계곡 어딘가에 거대한 용(龍)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다가, 고위산 정상을 향해 솟구쳐 오르려는 형상을 하고 있어 ‘와룡(臥龍)’이라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이 계곡은 신령한 기운을 품고 있으며, 예로부터 경치가 매우 뛰어나 ‘와룡동천(臥龍洞天)’이라 불릴 정도로 절경을 자랑했다.
계곡 곳곳에는 한때 폭포들이 흐르며 장관을 이뤘으나, 지금은 물길이 말라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신라시대에는 와룡못을 막아 물을 모았다는 전설도 남아 있으며, 지금도 와룡골 깊은 곳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인근의 틈수계곡은 돌 틈 사이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와 ‘틈수곡’ 또는 ‘틈수골’이라 불린다.
틈수곡 일대에는 와룡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상여바위, 알바위 등 전설이 서린 기암들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와룡사 뒤편 건물 한쪽에는 천룡사지에서 떠내려온 것으로 전해지는 부도 2기가 조용히 세월을 지켜보고 있다. 이 모두가 과거의 번영과 불교적 신앙의 흔적을 간직한 채, 깊은 숲 속에서 묵묵히 잠들어 있다.
# 와룡암(臥龍庵)
경주 와룡암은 조선 후기 경주 최부자댁의 7대손인 용암 최기영(1768~1834년)이 1814년 은거를 목적으로 세운 별당이다. ‘채산조수(採山釣水)’라는 말처럼, 아침에는 산에서 나물을 캐고 저녁에는 고기를 낚으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자 했다.
최기영은 와룡골의 깊은 산 속에 별당을 짓고, 그 주변에 진귀한 나무와 꽃을 심어 풍경을 가꿨으며, 물길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 그렇게 조성된 공간에서 서책을 쌓아두고 자족적인 삶을 영위했고, 이 소문을 들은 전국 각지의 문사들이 그를 찾아와 교류를 이어갔다고 전해진다.
이후 1816년에는 장남 최세린이 사마시(司馬試)-(조선 시대에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인 소과)에 합격했고, 최기영 본인도 1825년 58세의 나이에 성균관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는 1831년 교촌으로 이거했고, 와룡암은 이후 별장으로 사용되다가 어느 시점부터 법당이 들어서며 암자 형태로 바꼈다. 가문의 평안과 강녕을 기원하는 도량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현재 와룡암의 법당 건물은 본래 대웅전 옆에 위치했던 별도의 전각이었으나, 1982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지금의 건물이 대웅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법당 앞 높은 축대 위로 걸린 ‘대웅전’ 현판은 당시의 흔적을 보여준다. 대웅전 옆 계곡에는 한때 와룡폭포가 있어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지금은 물길이 메말라 그 당시모습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암자 입구에는 ‘와룡통천(臥龍洞天)’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와룡(臥龍)’은 ‘누운 용’을 뜻하고, ‘동천(洞天)’은 통상적으로 산과 물에 둘러싸인 절경을 의미한다. ‘동(洞)’을 ‘통’이라 읽기도 하는데, 이는 뛰어난 경관을 지닌 은거처, 곧 신선이 거처할 법한 이상향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렇듯 와룡암은 단순한 별당을 넘어, 은자의 삶과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가문의 정신과 불심이 깃든 장소로서 오늘날까지 그 뜻을 전하고 있다.
# 석종형 승탑(石鍾形僧塔)
와룡사 경내에는 천룡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지는 석종형 부도 두 기와 석등 하대석이 남아 있다. 이 두 부도는 조선 후기인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각각 다른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첫 번째 부도는 ‘운암당대사대백탑(雲巖堂大師大伯搭)’으로, 법당 앞 연못 위에 놓여 있다. 이 부도는 원통형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며, 윗부분은 세 단으로 구성돼 있다. 탑신 표면에는 당호인 ‘운암당대사대백탑’이라는 글자가 정교하게 음각돼 있어, 제작 당시의 섬세한 조형미를 짐작케 한다.
두 번째 부도는 ‘한월당대사선문탑(寒月堂大師善文塔)’으로, 산신각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종 모양의 탑신이 올려져 있어 실제 종과 흡사한 외형을 띠며, 이 역시 당호인 ‘한월당대사선문탑’이 탑신에 음각돼 있다.
이 두 부도는 각각의 스승에 대한 예경의 마음이 담긴 석조물로, 와룡사에 담긴 가문의 신앙과 불심, 그리고 그 전통의 맥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틈수곡 초입에서>
(전략)
이바 니웃드라, 산수(山水) 구경 가쟈스라.
답청(踏靑)으란 오늘 하고, 욕기(浴沂)란 내일하새.
아침에 채산(採山)하고, 나조해 조수(釣水) 하새.
갓 괴여 닉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화풍(和風)이 건듯 부러 녹수(綠水)를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새 진다.
(후략)
정극인이 1400년대에 지은 『불우헌집(不憂軒集)』에 실린 「상춘곡(賞春曲)」의 한 대목이다. 봄날 자연을 벗 삼아 안빈낙도의 삶을 노래한 이 작품은, 속세를 떠나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고자 했던 조선 전기의 문인 정신을 잘 보여준다. 경주 최부자댁의 7대손인 용암(龍巖) 최기영 역시 이러한 삶을 지향했던 인물로, 고위산 기슭에 자리한 와룡골에 은거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채산조수(採山釣水)’의 삶을 꿈꾸며 직접 연못을 만들었고, 지금 전해지는 와룡저수지가 바로 그때 조성된 것이라는 설이 구전되고 있다.
*상춘곡(賞春曲) : 조선 전기의 문신 정극인이 지은 정형 가사로, 그의 문집 『불우헌집』에 실려 있다. 단종 폐위 이후 고향 태안에 은거한 시기에 창작됐으며, 봄 경치를 감상하며 속세를 떠나 안빈낙도의 삶을 누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연에 대한 사랑과 인간 삶의 여유로움을 노래한 대표적 낙천 가사 작품이다.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