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매일통신] 울산에 남은 왕과 살았던 남자

영화 흥행 이후 엄흥도 관련설 지역별 내것 주장 개연성 없어 남은 흔적 토대로 콘텐츠 살려야

2026-03-15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울산여지도를 통해 엄흥도 이야기를 풀어낸지 몇주만에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삼백만 영화 대열에 올랐다. 한국 영화로는 25번째 천만 관객 돌파다. 재미 있는 부분은 천만 돌파 영화 가운데 사극이나 시대극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사실이다.

 왕과 관련한 사극 가운데 천만 관객을 돌파한 세편의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 천만 관객을 이끈 ‘왕의 남자’는 왕의 지위를 지키지 못한 첫 임금 연산 이야기다. 연산은 한명회의 사위였던 성종의 맏아들로 적장자이다. 그의 어미가 폐비 윤씨다. 어미의 죽임을 파헤쳐 사화를 일으킨 연산은 무당굿을 좋아해 스스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을 췄다. 울산이 발상지인 처용무를 좋아해 처용 탈을 쓰고 춤을 춘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서사가 사당패 공길의 이야기과 엮여 천만 관객을 만들었다.

 두 번째 천만 관객이 ‘광해, 왕이 된 남자’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역시 왕의 지위를 잃은 광해군의 서사를 다뤘다. 연산의 이야기와 달리 광해의 이야기는 팩트가 부족하다. 조선왕조실록 광해편에 남아 있는 한 줄의 글을 상상력으로 버무렸다. ‘숨겨야 할 일들은 조보에 내지 말라’ 광해군 8년의 기록이다. 보름 가까이 왕의 행적이 사라졌다는 팩트가 천만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역사 속의 빈 공간은 상상력을 부른다. 식상한 프레임을 바꾸자 관객이 몰렸다. 왕과 얼굴이 닮아 대역을 맡은 광대 하선이 스스로 왕이 된 듯 몰입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

 세 번째 천만 영화 역시 왕 이야기다. 앞선 왕처럼 노산군이라는 이름으로 계급장을 뗐지만 폭정과 패륜의 피해자가 됐다. 250년 뒤 단종으로 추존된 비련의 주인공이다. 칼럼에서 다시 단종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영화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과 반응 때문이다. 영화는 숙부에 죽임 당한 단종의 마지막 100여일을 새로운 접근으로 풀었다. 엄흥도 역의 유해진과 한명회 역의 유지태, 두려움과 분노를 매일 밤마다 한겹씩 가슴에 묻어두는 노산 역의 박지훈이 핵심이다.

 영화가 천만을 넘어 천오백만을 향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분분하다. 핵심은 세가지다.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에 대한 사실관계와 노산의 죽음에 대한 영화적 상상력, 그리고 엄홍도의 서사에 대한 팩트체크다. 우리에게 알려진 한명회는 칠삭둥이로 왜소하고 간교하며 난신(亂臣)의 권력형 비리 덩어리다. 그런 한명회가 영화에서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영월까지 내려와 엄흥도를 급박하기까지 한다. 사실일까.

 기록을 보자. 실록과 관련 사서에 따르면 한명회는 38세까지 과거에 번번이 낙방한 한량이었지만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과 말솜씨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체격도 크고 인상도 훈남이었다. 영화는 한명회의 외모는 바로잡았지만 엄흥도를 급박하고 영월까지 달려간 대목에서는 상상력에 과속페달을 밟았다. 영화적 상상력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은 단종의 마지막 장면이다. 노산으로 폐위된 단종은 영월 땅 청령포에서 한달여 정도만 지냈다. 기록을 보면 그해 여름이 끝날무렵부터 가을 즈음까지 서강에 큰물이 덮쳐 단종의 거처는 영월부 관아 동익헌인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청령포 광천골이 단종 유배지의 주 무대가 된 것과 엄흥도가 광천골 촌장으로 나오는 대목은 사실관계와 다르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주인공 격인 엄흥도에 대한 이야기는 좀더 깊이 다뤄볼 필요가 있다. 엄흥도의 경우 영화에서는 입담과 넉살의 필살기로 마을 재건에 앞장선 촌장으로 등장하지만 사료를 들추면 달라진다. 100일간의 유배와 비극적 죽임, 그리고 구천을 떠돌던 육신을 거둔 이야기는 어느 한 구석 밝은 대목이 없다. 그런 스토리 라인으로 영화를 풀어내면 천만 관객은 고사하고 100만도 어렵다는 건 상식이다. 통념을 뒤엎을 극적 상상력이 필요했고, 새로운 엄흥도가 탄생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뛰어난 상상력이다.

 문제는 단종의 비극과 엄흥도의 희생에 대한 시각이다. 세조와 주변의 권력자들이 단종의 흔적을 티끌 하나까지 지우려 한 이유는 하나다.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정통성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한명회는 그런 왕실의 불안을 역모로 진압했다. 마지막 장애물인 단종을 죽일 명분을 위해 금성대군을 영월 아래 순흥에 두고 기회를 엿봤다. 그 기록은 지금도 소백산 고치령 자락에 노산이 태백산신으로 자리해 있다. 한성부 군사를 풀어 역모의 땅으로 찍힌 순흥을 개 한마리까지 도륙한 기록을 보면 노산의 죽임과 그 직후의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 맥락에서 엄흥도를 바라보면 답이 나온다. 구천을 떠돌던 노산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는 광천골 촌장이 아니라 영월의 호장이었다. 호장은 호족의 우두머리로 지방의 유지다. 넉살과 입담으로 관아를 농락하는 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밥상 심부름을 하는 역할도 터무니 없는 설정이다. 계유정난을 불의로 읽고 단종을 유일한 왕으로 섬긴 엄흥도가 밤을 도와 영월을 떠난 것은 그런 배경이 깔렸다. 이후의 기록은 없다. 일부 지역에서 자기네 서원이나 비석을 두고 엄흥도 서사의 원조라 이야기 하지만 개연성이 부족하다.

   울산은 다를까. 물론이다. 비교적 많은 자료와 구술을 모아 정리한 울주의 <원사정재>에 엄홍도의 기록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영월호장(寧越戶長)이던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는 조선 초기에 시해(弑害)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淸?浦)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장본인이다.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뒤, 화(禍)를 피해 세 아들을 데리고 영남의 끝인 울산(당시 언양현)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언양현에 속했던 왕방리 금곡촌을 거쳐 중시조 엄흥도의 5세손인 엄선(嚴善)이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중시조의 6세손인 엄립(嚴立) 때에 울주군 온산읍으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울산이 엄흥도 관련 콘텐츠에 깃발을 흔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