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그래도, 씨앗은 남겨야 한다

2026-05-12     김석기 울산숲사랑운동 본부장
김석기 울산숲사랑운동 본부장

 조선시대 내내 봄은 가장 혹독한 계절이었다. 가을의 곡식은 바닥나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시기,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물로 허기를 달랬다. 이를 '보릿고개'라 불렀다. 이름은 소박하지만 그 속에는 생존의 긴장이 배어 있었다. 집집마다 곡간은 비어가고, 한 줌의 곡식이 하루를 좌우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남겨야 할 것이 있었다.

 이 춘궁기는 근대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수탈 속에서 먹을 것은 더 줄었고, 해방 직후와 6·25 전쟁을 거치며 삶은 다시 무너졌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사람들은 다시 같은 고비를 넘겨야 했다. 배고픔은 일상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지켜진 것이 있었다.

 보릿고개의 춘궁기에도 끝내 씨앗은 남겼다. 먹을 것이 부족한 시기에도 씨앗만은 손대지 않았다. 그것은 절제가 아니라 약속이었다. 다음 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고, 공동체를 이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원칙이었고, 오늘을 견디기 위해 내일을 포기하지 않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교육은 비용으로 줄이고, 환경은 부담으로 미루고, 인재는 소모하며, 산업의 기반은 단기성과에 맞춰 재단한다. 눈앞의 효율과 성과를 위해 축적과 준비를 뒤로 미루는 데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선택이 반복될수록 축적의 기반이 약해진다는 데 있다. 교육은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 아니라 비용으로 취급되고, 환경은 당장의 부담으로 미뤄진다. 단기 성과를 중심으로 설계된 구조에서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투자일수록 후순위로 밀린다. 그러나 씨앗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기다림과 축적이 없으면 어떤 결실도 기대할 수 없다.

 기후위기도 같은 맥락에 있다. 탄소를 줄이는 일은 불편하고 비용이 든다. 그래서 미루고 싶어진다. 그러나 미룬다고 해서 부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음 세대로 넘어갈 뿐이다. 우리가 남기지 않은 씨앗은 결국 다음 세대의 결핍으로 돌아온다.

 인구 감소도 비슷하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데에는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교육과 돌봄, 주거와 일자리 모두 긴 호흡이 요구된다. 그러나 단기적 성과를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이런 투자가 쉽게 밀린다. 씨앗을 먹는 선택과 다르지 않다.

 산업도 마찬가지다. 기술과 인력, 연구와 전환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고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눈앞의 수익과 경쟁에 밀려 장기적 기반은 흔들리기 쉽다. 종자를 남기지 않는 산업은 다음 세대를 지탱할 수 없다.

 울산은 지금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석유화학과 조선, 기존 산업의 경쟁력 위에 서 있지만 동시에 전환의 압박도 크다. 탄소중립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산업 구조의 변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기 성과가 아니라 장기 기반이다.

 특히 산업도시일수록 이러한 선택의 무게는 더 크다. 기존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산업으로의 전환을 준비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탄소중립은 단순한 환경 정책이 아니라 산업 구조를 재편하는 문제이며, 이는 곧 도시의 미래를 좌우하는 선택이다. 지금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반은 결국 사람과 기술, 그리고 방향이다. 교육과 연구, 산업과 환경을 연결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정책은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설계여야 한다. 그간 울산시의회 간담회 등을 통해 공론화가 진행되어 온 '울산시민환경교육원'은 이를 위한 하나의 구체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사람이 변해야 환경이 보전되고, 그래야만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울산시민환경교육원'은 시민과 청소년을 아우르는 환경 교육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씨앗은 형태를 바꿔 오늘에도 남아 있다. 사람일 수도 있고, 기술일 수도 있으며, 제도와 가치일 수도 있다. 그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로 드러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무엇을 남기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진다.

   어떤 가치와 가능성의 씨앗을 남겨야 할지에 대한 물음은 지금 우리 곁에 조용히 놓여 있다. 지속가능한 내일을 위해, 우리는 오늘 어떤 이름의 씨앗을 남기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