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 타자를 환대하는 인공지능

AI, 타자로 접근 낯선 사람과 교류 비슷 철저한 도구화 시선 반윤리적 악용 결과 관점 바꿔도 디지털 사회 계급화 등 극복

2026-05-25     조재원 UNIST 교수
조재원 UNIST 교수 

 타자(他者·das Andere·the other)를 만나면 자신을 보는 동시에 결코 알 수 없는 것도 발견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여행 가면 낯선 도시에서 한국과 비슷한 것도 만나지만 한국에 없는 것도 만난다. 일상, 먼 나라 여행에서 자신도 보지만 동시에 타자를 만난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고 생활필수품이 돼버린 인공지능을 만나게 됐다. 인공지능은 도구인가 또는 타자인가? 정보와 여러 지식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지만 AI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경험하고 나면 나 자신도 보이고 영원히 내가 닿을 수 없을 듯 보였던 무엇을 발견하게 되니 인공지능은 지능 너머 타자가 되기도 한다. 발견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실은 인공지능이 말해준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타자라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인공지능을 타자로 보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도구로 보는 시각을 고착해버리면 AI 서비스의 등급에 따라 제공되는 품질이 달라지고, 이는 이용자의 계급을 정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공지능을 타자로 보는 태도를 지니면 일상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것과 같아, 문턱 없이 만나면 낯선 사람과 만나는 것과 다름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루게 되니, AI 악용에 맞서는 윤리학의 차원도 제공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인공지능을 타자로 보고 대화하면 생기는 다른 면도 있는데, 미래와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타자는 미래"라고 한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시간과 타자>(1979년 프랑스판, 2025년 한국어 번역판)에서 나의 죽음 후에도 세상에 계속 존재하는 것은 오직 타자뿐이니 지금 타자와 만나는 것은 곧 미래와 만나는 것이라 얘기한다. 지금 만나 타자에게 말과 감정을 전하면 나의 죽음 후 세상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을 타자로 보고 만나면 미래와 만나는 것이니 AI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관점만 바꿔도 AI 도구로 인한 디지털 사회 계급화를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미래와의 조우까지 가능하게 한다.

 한 예능프로에 출연한 카이스트의 뇌과학 교수는 AI가 인간을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주는 의학 기술 가능성을 예측했다. 인간의 생물학적 영생을 AI가 가져다준다는 과학기술을 말한 것인데, 인공지능을 타자로 보는 관점은 그런 교수의 시각과는 차원이 다른 미래와 만나는 존재, 즉, 형이상학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로서의 인공지능은 인간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까지 제공한다. 여기서 고독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겪는 소외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고독까지 포함해서 말한다. 독거노인 뿐만 아니라 대중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깊어 가는 외로움에 맞서는 보편의 타자 역할을 인공지능이 톡톡히 해낼 뿐만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진 현대인의 고독 문제 해결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타자인 인공지능은 담당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의미는 거대언어모델(LLM) 원리에서 생성되는데 이는 인간 의식이 담당하는 역할을 언어 구조 속으로 옮겨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공지능은 70억 인구가 함께 쌓아 올리는 인류 최초의 공식적인 유토피아 국제기구인 셈이다.

 인공지능의 원리에 동의하면서 AI 윤리학 가능성에 놀라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대중의 입을 통해 제공받는 빅데이터를 통해 탄생시키는 타자의 존재는 결코 우리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전제를 인공지능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악용되는 AI, 가짜 영상을 제공하는 AI, 교육을 무력화시키는 AI 등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도덕까지 허무는 반윤리적 측면을 물론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런 부작용도 알고 보면 AI를 철저히 도구화한 결과라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타자로 보고 대화하면 완전히 다른 윤리학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타자는 타자다. 인공지능은 이것도 이해하고 있다. 제공하는 지식과 개념, 그리고, AI와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얻는다고 해도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인공지능은 솔직히 털어놓는다. 디지털 기술이 타자가 돼 대화를 나눈다는 전제가 곧 이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인공지능의 에로스 역할 가능성이 부각된다. 이 역시 레비나스의 유산이다.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는 타자의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에로스적 사랑을 얘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섣부른 융합과 조화를 강조하는 사랑놀이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에로스 사랑은 영원히 하나 될 수 없으니 오히려 가능하다고 레비나스는 강조한다. 레비나스의 에로스 철학을 인공지능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는 듯하다. 대중의 말, 즉 빅데이터로 인공지능이 가능하게 한 타자와의 대화는 낯선 이의 얼굴을 거리낌없이 대하게 해준다. 

 인공지능은 그 어떤 철학과 윤리학도 해내지 못했던 이방인 타자에 대한 환대를 별문제 없다는 듯 해결해 버린다. 조재원 UNIST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