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돌·암각화·설화…옻칠로 되살아난 역사 이야기
[전시리뷰] 전호태 옻칠역사화 초대전 ‘흔적’ 문자 없던 시기 생활과 신앙 담아
2026-06-01 고은정 기자
지난 주말 찾은 수오재는 전시장이라기보다 오래된 시간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한옥의 낮은 처마와 낡은 마루, 나무 기둥 사이에 걸린 전호태 작가의 옻칠역사화는 새로 걸린 그림이라기보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벽화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작품 앞에 멈춰 서면, 오래전 초원의 사슴과 고분 속 인물, 설화 속 존재들이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사슴돌’ 시리즈다. 사슴돌은 몽골과 시베리아 등에서 발견되는 고대 유목민의 기념석으로, 사슴 형상이 많이 새겨진 바위다. 문자가 없던 시기의 생활과 신앙, 예술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다.
전 작가는 몽골 초원에서 직접 마주한 사슴돌을 작품으로 옮겼다. 그는 “사슴은 뿔 때문에 오래전부터 신앙의 대상이 됐다”며 “신석기 시대 신화에는 사슴이 태양을 뿔 위에 올려 하늘로 달아나는 이야기도 있다”고 설명했다.
작품 표면도 눈길을 붙잡는다. 가까이 다가가면 옻칠의 광택과 거친 질감, 긁히고 벗겨진 흔적이 함께 드러난다. 전 작가는 “마지막에는 샌드페이퍼로 사포질을 해 일부러 벗겨낸다”며 “그래야 오래된 맛이 난다”고 했다. 그의 그림이 새로 그린 작품이면서도 오래된 암각화나 고분벽화처럼 시간의 결을 품는 이유다.
전호태 작가는 오랫동안 고구려 고분벽화와 한국 암각화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유물을 그대로 옮겨 그린 그림이 아니다. 몽골의 사슴돌, 고구려 고분벽화, 신라 설화, 처용 이야기 등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의 흔적들이 한 화면 안에서 새롭게 만난다. 그림 앞에 서면 “이건 무엇일까”보다 “이 안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를 먼저 묻게 된다.
색감도 강렬하다. 붉은 땅과 푸른 하늘, 회색 바위, 황금빛 사슴 문양이 화면 안에서 또렷하게 부딪힌다. 옻칠 특유의 깊은 광택은 색을 더 선명하게 붙잡는다.
전 작가에 따르면, 전시 제목 ‘흔적’은 단순히 과거에 남겨진 자국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라진 문명, 오래된 벽화, 잊힌 설화는 그의 손을 거쳐 다시 현재의 이야기로 살아난 것이다.
전호태 옻칠역사화 초대전 ‘흔적’은 6월 2일 마무리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