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 ‘님’의 전성시대

무분별하게 확산된 과잉 존칭 우리말 고유의 논리 체계 훼손 적절한 높임으로 품격 지켜야

2026-07-13     최진구 울산시 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철학박사
최진구 울산시 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철학박사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필자는 "커피가 나오셨다고? 이게 무슨 말이지? 그럼 커피님을 모시고 와야 되는 건가?" 얼마 전 어느 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서 지나칠 정도로 존칭을 쓰는 모습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올바른 우리말을 사용하고 전달해야 할 방송에서 조차 이런 유형의 언어 사용을 듣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방송 진행자들이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님'이다. "2345님 안녕하세요". "6789님 말씀해 주세요". 요즘 방송 진행자들, 특히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들은 일상적으로 쓰고 있고 우리는 그냥 듣고 지나친다. 숫자는 사람이 아니다. 전화번호는 개인을 식별하기 위한 기호일 뿐 존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언어 논리상 "2345님"이라는 표현은 어색하고 잘못된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방송에서 수 없이 듣고 있기에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요즘의 추세인 듯하다. 그러나 우리말의 대표적 존칭인 '님'을 사물이나 숫자에 까지 붙이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물론 번호 자체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번호의 소유자를 지칭하려는 의도인 것은 이해하지만 대중 앞에 나서는 방송 진행자라면 깊이 고민해 봐야 할 대목이다. 그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방송도 있다. K방송사의 아나운서를 포함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 대부분은 전화번호에 '님'을 붙이지 않는다. "2345 쓰는 분" "5678 쓰는 청취자께서 사연 보내 주셨습니다."와 같이 표현한다. 대한민국 방송사의 수많은 프로그램 진행자들이 모두 전화번호에 '님'을 붙여도 이 방송의 진행자들은 휩쓸리지 않고 올바른 우리말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선배 방송인 입장에서 자부심과 함께 칭찬해 주고 싶은 대목이다.

 '님'은 원래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존칭이었다. 예를 들면 스승님, 부모님, 사모님, 아드님처럼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으로 사람을 높여 부르는 접미사 또는 의존명사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사람이 아닌 사물이나 숫자에 붙여 사용하는 것은 전통적인 우리말의 쓰임과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먼저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서비스산업이 발달하면서 고객에 대한 친절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존칭의 과잉 사용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이런 영향이 사회 전반에 고착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에 따른 「인터넷 언어문화」가 생겨나면서 상대방에게 '님'을 무제한 사용하는 관행에서 비롯됐다고 보여 진다. 이는 상대와 고객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려다가 오히려 언어의 논리성 훼손으로 변질되어 버린 사례라고 하겠다. 높임말은 상대를 존중하기 위한 것이지만, 존중의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표현은 바람직한 높임말이 아니다.

 언어를 통한 존중은 단순히 예의만으로 이루어지는 존칭 사용이 아니라 정확성과 합리성도 함께 갖춰야 한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 마음이 언어의 원칙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방송과 언론은 유행어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기보다 정확하고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방송 진행자는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와 청취자에게 언어 습관을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더욱 큰 책임감을 가지고 마이크 앞에 서야 한다.

 상대에 대한 존중은 중요하다. 그러나 존중이 '님'이라는 말 한마디를 무한정 붙인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와 정확한 언어 사용이 함께할 때 진정한 존중이 이루어진다. '님'은 본래 귀한 말이었다. 귀한 말은 귀하게 사용할 때 가치가 있다.

 우리말의 품격은 지나친 높임이 아니라 적절한 높임에서 나온다. 방송과 언론,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언어의 정확성과 예절 사이의 균형을 되찾을 때, 우리말은 더욱 아름답고 품위 있는 언어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님'을 아끼고 바르게 쓰는 일은 단순한 문법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언어문화의 품격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따라서 새로운 표현이 생겨나는 것 자체를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존칭은 단순한 말버릇이 아니라 우리말의 중요한 문법 체계이다. 공손함을 표현하려는 의도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지 않는 과잉 존칭이나 '님'의 무분별한 확대 사용은 우리말의 정교한 존대 체계를 약화시킬 수 있다.

   결국 바람직한 존칭은 예의와 문법이 조화를 이루는 표현에서 비롯된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은 유지하되, 우리말 고유의 존칭 체계를 이해하고 상황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품격 있는 아름다운 언어생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