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울산여지도-94] 당월과 우봉, 산업화에 밀린 실향의 바다

염천 폭염에 질린 천혜의 바다 밀복 ‘곳바리’ 가득한 황금어장 공단 건설로 쫓겨난 이주 현장

2026-08-02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염천이다. 연일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에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열기가 여름을 장악했다. 여름의 한 가운데를 피하는 길을 바다가 제격이다. 오늘 울산여지도가 향한 땅은 울산의 남쪽 바다다. 한 때 동해 남쪽 어장 가운데 가장 흥청거렸던 항구였던 온산으로 달려갔다. 지금은 거대한 공장이 만든 굴뚝이 시야를 가리지만 그래도 우뚝한 플랜트와 거대한 공장건물 사이로 푸르디푸른 바다가 절규하는 빛으로 손짓한다.

 온산의 바닷길은 수천만 년의 서사가 깔려 있다. 지질학적으로 귀중한 자연유산인 타포니 해안이 비경을 펼치던 바다 아래, 만선의 기쁨으로 왁자했던 어부들의 여유가 풍요로운 땅이었다. 그런 바다가 산업화 이후 해안이 잘리고 삶의 터전이 파헤쳐지면서 쫓겨나듯 떠나야 했던 이주민의 사연은 이제 수십년이 지나 애향비 하나로 덩그렇게 남아 있다. 바로 그 땅, 지난 1974년 ‘온산공업단지 조성 기본계획’ 이후 지도 위에서 자취를 감춘 당월(堂月)과 우봉(牛峰)이다.

 우봉은 그 지명과 역사 자체가 한 편의 질편한 이야기다. 마을 뒷산인 봉화산의 생김새가 마치 소가 엎드려 바다 쪽(명선도 방향)을 향해 머리를 숙인채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우방(牛方)’ 혹은 ‘우봉’이라 불렸다. 이름이 없던 시절, 까마득한 선사의 하늘 아래 이 땅은 인간이 정착한 천혜의 주거지였다. 그 역사는 신석기 말기로 거슬러 가지만 기록에는 신라 헌강왕이 다녀갔다는 이야기가 처음이다. 그 기록이 마을 뒷산 이름을 임금산이라 칭했으니 우봉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를 증명한다.

 우봉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온산의 법정 마을 중 면적은 가장 좁았지만, 실상은 전국에서 어획고가 가장 높은 밀복의 주산지였다. 지금도 밀복은 복어집에서 최고의 인기메뉴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동해바다 밀복은 왜인들이 탐을 낸 인기 어종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그 인기는 이어져 겨울철이면 전국에서 모여든 복어잡이 배들과 복어를 사려는 차량들로 마을은 늘 북새통을 이뤘다. 얼마나 많은 돈이 이 작은 어촌에 돌았으면 바로옆 당월과 우봉을 관할하던 은행까지 지점을 내 어민들의 편리를 도왔을 정도였다.

 우봉해안의 흔적을 따라 매립지를 올라가면 당월과 만난다. 당월(堂月)은 우봉처럼 지금 흔적이 없다. 동해의 푸른 달빛을 품은 아련한 어항이지만 산업의 거대한 물결 속에 완전히 자취를 감춘채 삭막한 매립지로 회색빛만 남아 있다. 그 사라진 어항 당월은 오랫동안 ‘당포’라 불리던 어촌이었다. 당포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 땅은 행정구역 개편을 거치며 당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라지기 전까지 335세대, 약 2,000명에 가까운 주민이 북적였던 온산의 중심지였다.

 당월에는 면사무소, 우체국, 당월초등학교, 수협, 지서 등이 밀집해 있었고, 장터 입구의 버스 종점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지금도 울산 토박이들은 기억하지만 시내에서 당월까지 가는 버스와 언양에서 당월로 오가는 버스가 주말마다 만원이었다. 당월하면 빼놓을 수 없는 동해바다 진객이 ‘곳바리(상어)’다. 경상도에서는 잔치상에서 빠질 수없는 귀한 어종이었다. 우봉의 밀복과 당월의 곳바리는 온산 일대를 흥청거리게 했고, 겨울이면 가마니에 어획물을 가득담아 남창이나 창평들의 쌀과 물물교환하던 풍경이 일상이었다.

 당월 앞바다의 연자도와 ‘낫끝’은 상춘객들의 소풍터였다. 지금은 매립된 연자도는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지만 공단 개발과정에서 고려시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건물지와 다수의 유적지가 발굴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매립되기 전 연자도는 해안에서 약 600m 지점에 위치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오래전 연자도에는 참깨를 만석이나 짓는 만석꾼이 살았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섬 안에 지어두고 부러운 것 없이 잘 살았지만 육지에 한번씩 나들이를 하려면 뱃길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어서 육지까지 다리를 놓기로 했다. 일꾼들을 불러 섬 동쪽에 있는 바위들을 옮겨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이 다리가 반 이상 완성돼 갈 때 정체불명의 도적들이 나타나 만석꾼의 재물을 모두 훔쳐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만석꾼도 홀연히 시라졌다. 인간의 욕심을 풍자한 이야기지만 정작 연자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욕심에 사라졌다.

 그 전설같은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두꺼비 바위(의논암)의 흔적과 만난다. 제주도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온 두꺼비 부부가 육지에서의 삶을 의논하다 돌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는 이야기만 남았다. 공단 조성으로 진하 쪽 명선교 인근으로 옮겨졌으나, 이송 도중 파손된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이주역사의 생생한 증좌다.

 안타깝게도 이 풍요의 땅은 현대사의 아픔을 콘크리트에 덮은채 한세월을 보냈다. 바로 산업화의 비극인 온산병 이야기다. 온산병은 1970~1980년대 울산 온산 일대 주민들에게 집단적으로 발생한 중금속 중독 증후군이다. 당시 정부 주도로 조성된 온산국가산업단지에는 비철금속 제련소와 화학공장이 밀집해 들어섰고, 이 과정에서 카드뮴·납·아연 등 각종 중금속이 토양과 하천, 해양으로 유출됐다. 주민들은 오염된 물과 농작물, 수산물을 통해 중금속에 장기간 노출됐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과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몇차례 조사가 있었고 전국적인 관심도 받았지만 정부는 공장과 주민의 질병은 연관성이 없다고 책임을 지웠다. 

   책임공방이 오가던 1985년 정부는 갑작스럽게 ‘울산·온산공단 주민 이주 대책’을 발표했다. 총 1,198억원의 예산을 들여 공단 내 8,367가구 3만7,610명 전원을 이주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주민들이 떠나면서 아이들의 꿈이 자라던 춘도초(1991년), 당월초(1992년), 온산초(1993년) 등 시골 학교들도 문을 닫았다. 학교와 마을이 사라진 자리는 철탑과 사일로 등 거대한 구조물이 들어서며 천혜의 자연은 거대한 인공물로 채워졌다. 쫓기듯 떠난 주민들은 지난 2010년 화산근린공원에 망향비를 세워 망향의 아픔을 달랬다. 공원에는 당월과 우봉을 비롯한 19개 마을의 이름과 당시 마을 전경 사진이 사라진 과거를 추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