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영의 일본 후지산 등반기] 천천히 오르는 자에게 정상을 허락하는 산

[중] 눈이 시리도록 강렬한 일출 ‘감탄’ 칠흙같은 어둠 헤드랜턴 불빛 의존 앞사람 발자취 따라 내딛는 한걸음 거친 숨 고르며 오르막길 긴장 잠시 장엄하게 떠오른 태양 또 다른 감동

2026-08-13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후지산 8합목(간소무소산장-3,250m)에서 바라본 동쪽 일출 모습. 필자 제공

 

7합목(카마이와칸-2,800m)에서 8합목(간소무소산장) 으로 오르는 구간. 필자 제공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새벽 2시, 밤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 일행은 세이칸소(星觀莊) 산장을 출발해 7합목(가마이와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머리에 착용한 헤드랜턴 불빛만이 앞사람의 발자취를 비추고 있었다. 말없이 한 걸음, 또 한 걸음. 모두가 자신의 호흡에 맞춰 묵묵히 산길을 걸었다.

 한 시간 남짓 걸었을까. 해발 2,800m의 7합목에 도착했다. 어둠 속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는 여러 산장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이곳이나 그 위쪽 산장에서 하루를 묵으며 정상 일출을 준비한다고 한다. 특히 7합목은 후지산 동쪽으로 펼쳐진 태평양에서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체력이 허락한다면 8합목까지 올라 숙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자신의 컨디션에 맞춰 일정을 조절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쪽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먼동이 트는 기운을 바라보며 우리 일행도 다시 배낭을 메고 8합목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7합목을 지나면서부터는 공기 중 산소량이 평지의 약 70%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 때문에 고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고산병 증세를 겪기 시작하고, 호흡이 가빠지거나 두통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이 구간은 체력과 컨디션의 한계를 느껴 산행을 포기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길 또한 만만치 않다. 가파른 화산암 지대를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는 발 디딜 곳을 신중히 찾아야 할 만큼 험하다. 때로는 바위를 손으로 짚고 몸을 끌어올려야 할 정도여서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긴장의 연속이다.

 ‘내 손과 발이 문어의 빨판처럼 바위에 착 달라붙으면 얼마나 좋을까’ 혼잣말 같은 생각을 하며 숨을 고른다. 서두를수록 숨은 더 가빠지고, 천천히 걸을수록 산은 조금씩 길을 내어준다. 후지산에서는 산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산의 호흡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오르는 비결임을 몸으로 깨닫게 된다.

 주변 풍경도 이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검은 화산암 지대는 마치 우주의 어느 행성 표면에 내려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생명체의 흔적은 사라지고, 오직 검은 바위와 하늘,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만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구간에는 산꾼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여기서 넘어지면 요코하마 앞바다까지 굴러간다."

 물론 웃으며 하는 농담이지만, 그만큼 경사가 가파르고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구간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호흡에 맞춰 묵묵히 한 걸음씩 정상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해발 3,100m에 자리한 태자관(太子館·타이시칸)은 요시다 루트의 대표적인 산장 가운데 하나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태평양 너머로 떠오르는 후지산의 일출을 맞이했다. 시각은 새벽 4시 40분경이었다.

 예로부터 ‘3대가 적선을 해야만 볼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질 만큼 후지산의 일출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은 우리나라 간절곶의 일출과 다를 바 없었지만, 해발 3,100m의 이국땅에서 태평양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광경은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붉은 태양이 수평선 위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자, 산 아래 구름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후지산을 오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에도 감탄과 환희가 번져갔다. 필자 역시 눈이 시리도록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해발 3,250m의 원조실(元祖室-간소무로)을 지나 8합목의 마지막 산장인 해발 3,400m 토모에관(巴館)에 도착했다. 이곳은 요시다 루트와 스바시리 루트가 만나는 지점으로, 정상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가 남아 있다. 토모에관에서는 배낭을 맡긴 뒤 가벼운 차림으로 정상을 다녀올 수 있어 많은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8합목을 지나면서부터는 돌과 자갈길이 점차 줄어들어 발걸음은 한결 편안해진다. 그러나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표고가 더욱 높아지면서 산소는 한층 희박해지고, 고산병 증세를 가장 쉽게 느끼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이럴수록 속도를 줄이고 자신의 호흡에 맞춰 걷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후지산은 빠르게 오르는 사람보다 천천히 자신의 리듬을 지키는 사람에게 정상을 허락하는 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검은 화산암과 붉은 화산재가 층층이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언뜻 보면 식물이 자랄 것처럼 보이지만, 풀 한 포기조차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화성의 표면을 걷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 낯선 풍경 속에서 우리는 흙과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한 걸음씩 후지산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계속)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